[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108)] 서순석 '정선 아라리 폐가에서 2 - 달'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정선 아라리 폐가에서 2

                   - 달

                       서  순  석

 

박공을 무등 태워 달빛 흘린 단청 밑엔

앉아서 쉴 난 닢 핀 항아리도 있었건만

천리향 낭자한 밤에 그림자도 깨졌다

 

한 연으로만 쓴 전통적 음수율의 평시조이다.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된 곳은 강원도 정선의 한 폐가이다. 시의 배경이 곧 시상의 중심 초점을 이루고 주제에 곧바로 맞닿아 있다.

지극히 짧은 단시조로 시조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정밀(靜謐)의 극치를 보여준다. 무대가 산골 오지의 폐가라면 다소 을씨년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 지극히 고요하고 평안하다.

시인 특유의 시적 상상력 덕분이다.

‘박공을 무등 태워 달빛 흘린 단청 밑’이라고 했다. 당연히 지붕 위로 달이 떴을 게다. 그런데 달빛이 맞배지붕의 박공을 오히려 무등을 태웠다고 했다. 어쩌면 밤하늘의 중천으로 두둥실 떠가는 듯한 지붕이다. 사찰도 아닌 민간의 폐가에 있을 리 만무한 단청이 흘러내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마당 한쪽 장독대엔 깨진 항아리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어쩌면 다갈색 항아리에 새겨진 난의 잎새가 더욱 교교히 자태를 흘릴 듯한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깨어져 그 문양조차 없다. 비록 폐가의 그림자마저 깨어졌어도 ‘천리향 낭자한 밤이다. 굳이 누가 부르지 않아도 그 꽃 향에 젖은 능선을 타고 정선 아라리 한 자락 흘러내릴 듯한 밤이다.

정선의 탄광이 성업을 이룰 때는 인구가 십만이 넘던 동네였다. 동네 강아지도 만 원권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풍족했던 지역이 폐광으로 소멸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곳이다. 그나마 인총이 모여있는 저잣거리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산골 깊숙한 골로 들어가면 폐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니, 거의 태반이 폐가라는 말이 맞는다고 해야 한다.

시인의 발길이 닿았던 고샅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오늘도 그 길 그 마당에는 아라리 가락을 타고 달빛이 여전히 흐를 것이다.

 

 

서순석 시인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자리 네 옆자리』 외 다수

정운엽 문학상 등 수상

경기시조시인협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