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7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동한다’

김승종 / 전 연성대 교수·시인

 

 우리는 이 세속의 생애에서 여러 사별을 겪는다. 어떤 계기에 그 면면을 헤아려본다면 그 수치도 적지 않고, 우리의 삶에 점철된 보편 운명이라 하더라도 하나하나 고개를 숙이거나 들게 한다. 그 어느 사별에서도 존재의 무상과 공허에 우리의 영혼은 방황한다. 혈친(血親)이나 친구라면 더욱 그러한데, 최악은 부모가 되어 자식을 잃는 일이다.

            

- 꿈에, 아빠가 돌아가셔서 울다 깼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 꿈에, 이모님이 보고 싶다 오라 하셨다

- 눈을 뜨니 부고가 와 있었다

 

- 꿈에, 은사님이 현관에서 나를 껴안으며 기도해 줘서 고맙다 하셨다

조간신문 위로 부고가 날아들었다

 

- 꿈에, 옛 연인이 거실 한쪽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그의 부고를 전하는 전화를 받았다

 

- 꿈에, 어머니가 오셔서 자장가를 불러 주셨다

강 건너기 전, 어머니는 형제들의 전화선을 잘라 딸의 단잠을 지켜주셨다

 

- 비몽간에, ‘다 이루었다는’는 음성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야의 마지막 숨이 가늘게 버티고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동한다

진동하며 자신을 알린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동한다」/허향숙 

 

 1연은 ‘아빠’와의 사별, 2연은 ‘이모님’과의, 3연은 ‘은사님’과의, 4연은 ‘옛 연인’과의, 5연은 ‘어머니’와의, 6연은 ‘수야’와의 사별을 다루고 있다. 화자의 관련 심경이 어디에도 표출되어 있지 않지만 그 부재에서 오히려 독자는 화자의 폐부에서 터질 듯이 흥건한 비애와 비통의 누수를 느낄 것이다. 더욱이 1연 1행의 ‘울다 깼다’, 2연 2행의 ‘보고 싶다’ 3연 1행의 ‘껴안으며 … 고맙다’, 4연 1행의 ‘거실 한쪽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운운은, 우리의 화자 심정 추정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치며 사별의 그 구체 정한을 피부로 공감하게 한다. 

 우리는 그러다가 6연 ‘수야’와의 사별이 앞과 다른 방식과 태도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목하게 된다. 다른 사별은 ‘꿈’에서 대상 인물의 사망이나 조짐이 현시되는데, ‘수야’의 경우 그렇지 않다. ‘비몽간’, 즉 일상 현실의 깨어 있는 조리의 시공에서 사망 상황에 직면한다. ‘수야’의 경우도 ‘‘다 이루었다는’는 계시 같은 음성[화자 자신의 예감에 관련된 변주로 추정되는]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어디까지나 꿈속이 아니라 현실의 실제 사행.   

 이 차이는 죽음 앞에서는 작지만 화자의 입장에서는 크다. 이 사별을 화자는 꿈에서도 상상하기 싫었으며, 그만큼 비애와 비통의 강도와 부피가 가장 격심할 수밖에 없다는 압력을 우리에게도 우회 지시한다. 꿈이지만 꿈에서라도 맞은 사별은 마치 백신과 같은 예방 비슷한 효과가 있지만, 현실의 일상에서 직접 봉착하고만 사별은 대번에 심장에 깊은 상처를 낼 수밖에 없다. ‘‘다 이루었다는’’는 메시지도 그러니까 화자가 감당하지 못할 비애와 비통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야’와 연대하여 희석하려는, 꿈에서와 같은 예방 조치에 해당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수야’가 화자의 딸일 것으로 이미 짐작했다. 지인이나 이웃이기 어렵고 질녀라고 하기도. 아닌 게 아니라 6연 2행 ‘수야의 마지막 숨이 가늘게 버티고 있었다’는 이전 연에서 볼 수 없던 직핍 묘사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화자와의 관계가 범상하지 않다는 시사도 내포하고 있다. 

 화자는 여러 뼈아픈 사별[5연 ‘어머니’와의 사별에서, ‘꿈에, 어머니가 오셔서 자장가를 불러 주’었고, ‘어머니’가 운명하기 전에 아들들에게 밤중에 누이에게 부음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는데, 그래서 더욱 그러한]에 이어, 딸과 격절되는 처지마저 겪게 된 것이다. 자식과의 이별은 그 강도가 가장 세고 깊어 일찍이 선인들이 ‘참척(慘慽’)이라 하였는데, 연관된 전래의,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그 시신을 묻는다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말, 그 뜻을 따져보면 얼마나 지극한가. 죽기 이전에는 그 비애가 소진되지 않는다, 즉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내포도 있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가 정작 부각하는 메시지는 독자 여러분이 이미 파악하셨듯이 종결 연 7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동한다/진동하며 자신을 알린다’이다. 6연의 ‘가늘게’ 떠는 ‘수야의 마지막 숨’과 같이, 1연의 ‘전화벨’에는 ‘아빠’의 그 숨이, 2연 ‘부고’장에는 ‘이모님’의 그 숨이, 3연의 ‘조간신문’ ‘부고’란에는 ‘은사님’의 그 숨이, 4연 ‘전화’의 부고를 알리는 목소리에는 ‘옛 연인’의 그 숨이, 5연 ‘어머니’의 유언에는 ‘어머니’의 그 숨이 작용하며 자신을 알리는 것을 포함해, 모든 ‘존재’가 그렇게 급기야 자신을 세계에 알리는 진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면 이 메시지는 이제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철리가 아닌 데도 왜 우리는 새삼 감명(感銘)을 받는 걸까. ‘수야’의 ‘가늘게’ 진동하던 ‘마지막 숨’. 우리도 되돌아가 바라보며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고 하다가, 자신 역시 이 세상에서 그 종국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에서 발원하는 그 진동으로 자신을 알리기는 할 것이라고 문득 각성하고, 나아가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그 진동을 ‘비몽간’에 보고 들어서 그런 것인가. 

 다음 시는 위 시의 후속이다. 화자가 ‘수야’와 사별하며 겪었던 사정도 알 수 있다. 

     

아이가 힘겹게 숨을 몰고 있었다

담당의에게 빨리 와 달라고 요청했다

끝내 그는 오지 않았고

아이는 숨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사망 선고를 하러 온 그에게 물었다

왜 오지 않았죠?

살릴 수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요

그 판단을 왜 당신이 하나요?

그날 이후로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유다에게 악을 심어 놓은 것처럼

세상에는 의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평생 남을 미워해본 적 없는 나는

그에게도 똑같은 슬픔을 주십사 기도했다

아이가 놓친 봄을 십수 년 보내고서야 

마음 한편을 지키고 있던 용서가 손을 내밀었다

날카로운 울음의 칼날에

내 안의 악마는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 「유다」

 

 ‘아이가 힘겹게 숨을 몰고 있었’으나[존재의 진동], ‘담당의’는 ‘끝내’ ‘오지 않았고’, 나중에 다른 ‘살릴 수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우리는 ‘그 판단을 왜 당신이 하나요?’란 엄마 화자의 항의에 동감하고 동의한다. ‘그날 이후’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에게도 똑같은 슬픔을 주십사 기도’하는 화자를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이 세속에서는 이상으로 상황이 끝날 것이다. 갈등의 악착 그 자체로.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시에서 그 진경을 본다. 마지막 네 행에서. 화자의 ‘마음 한 편’을 내내 ‘지키’고 있다가 ‘용서’를 ‘내밀었’던 ‘손’은 누구의 ‘손’인가. 우리는 누구라고 하기가 저어된다. 그렇다. 그때 그 ‘진동’은 화자의 가슴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병행되던 ‘십수 년’ 비애와 비통, 원망과 원념을 마침내 제거하는 주체가 된다. 화자의 오랜 ‘날카로운 울음의 칼날’을 설득하여, 그것도 ‘거꾸로 매달’게 해서. 이 시는 참척 비극을 겪은 모든 부모에게 바치는 승화의 헌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