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방학을 할 때 나이 든 우리들은 공부를 했다.
‘노친네 학생’들은 지방 산 속의 서원을 찾아 떠나 임간수업을 함께 하곤 했다.
시원한 곳에서 학문을 궁구한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있었으나 술을 누구보다 아끼던 중재(中齋) 형과 나는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자고... 그런 일체형 생활을 은근히 즐기었다.
중재 형의 본명은 민순기이고 1947년 생으로 나보다 세 살이 많았다.
서울농대 수의학과를 나왔으며 젊어서는 검역소에 근무하여 목에 힘 좀 주었다나 보다.
나하고는 청계서당에서 처음 만나 가시는 날까지 무려 10년하고도 7개 성상을 함께 공부한 전무후무한 동학이다.
장마가 그치고 무더운 이 맘 때가 되면 불현듯 중재 형이 그리워진다.
“화당, 소주 한 잔, 좋지?”하며 옆에 와서 툭 칠 것만 같다.
성균관 한림원으로 주 2회(화·목요일) 오경을 읽으러 다닐 때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한 잔’을 거른 날이 없었다.
중재 형은 잠실 살고 나는 수원 살았다. 공부 이야기 외에는 별로 할 이야기도 없으면서 만나면 그저 좋았다.
중재 형은 사람 좋기로는 두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그런 품덕을 갖춘 군자 중의 군자였다.
그런 사람이지만 중국 여행을 가면 아주 어린애가 된다.
늘 같은 방을 썼다. 일단 방에 들어가면 속옷도 네 것 내 것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분방했다. 입에 붙은 몇 마디 중국말로 소란을 피우다, 저녁에 야시장에라도 갈라치면 "준밍(尊命)"을 외쳐대며 앞장섰다.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가자 슬그머니 눈물이 난다.
요즈음 나는 솔직한 사람을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면 꼭 눈물이 난다. 그래서 대놓고 울어도 괜찮다.
중재 형은 가고, 나도 병세가 완연하다.
아, 지금 울면 안 될 것 같다. 이 글의 뒷마무리를 못 할 것 같아서,
천명이라는 게 다 뭔지, 그래도 군자는 고궁(固窮)해야 하는 건지.
중재 형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손 흔들며 가시던 날 써 놓은 만사(輓詞)나 한 번 더 읽자.
나도 사람인지라 애통한 마음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참아가며 서로 거울처럼 마주보았던 평생 동학을 이렇게 보냈다.
<통곡, 중재 형을 떠나보내며>
못 다할 슬픔 저녁 어스름 붉은 노을 쓸쓸하더니
영원하리라던 중재 형 의리
대인의 덕성과 풍류가 흘러넘치더니
곡 중에 끝난단 말인가.
야시장 목로주점 쉬이 못 잊었을 텐데,
임간수업 뭐 그리 떠들었을까
청계 계곡에서 이미 이룬 학덕
어이 할꼬 어이 할꼬, 못난 늙은이.
<통곡중재형(痛哭中齋兄)>
박모운하처처홍(薄暮雲霞凄凄紅)
중재절의상무궁(中齋絶義想無窮)
대형품덕남상거(大兄品德濫觴去)
호걸풍류곡리종(豪傑風流哭裏終)
야시주가망득이(夜市酒家忘得易)
임간고숙기연홍(林間古塾豈然訌)
청계시습승당과(淸溪時習昇堂過)
오호애재호학옹(嗚呼哀哉好學翁)
-계묘 시월 삭칠일 신사(癸卯 十月 朔七日 辛巳-202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