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76)] ‘인자 그만 가시오’
중환자실에 누운 울아비
숨이 자꾸 꺼져갈 때
울엄니 귀에 대고
못 박았지
인자 그만 가시요
자석새끼들 고상시키지 말고라우
울아비 저승 문턱 넘다 말고
두 눈 번쩍 뜨더니
링거줄 홱 잡아챘다
손등에 꽂힌 바늘이
핏줄 따라 파르르 흔들렸다
깜짝 놀라 손 부여잡으니
나를 지그시 보다가
바쁜디 뭣허러 왔냐이
- 「임종」/오봉옥
이 시가 묘사하는 병실 상황은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낯설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임종을 앞둔 남편에게 하는 아내의 말[4연]과,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9연]은 더욱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사연들, 자신을 속여 거리에 버린 자식을 끝내 숨기고 시설로 이송되는 늙은 부모 이야기를 어디 한두 번 들었냐고도 하면서. 그래서 시가 반드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인생의 국면이나 보기 어려운 신기한 사연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에 우리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 시를 거듭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다시 읽게 하는 요인을 설비하고 있어 보인다. 이 또한 독자들의 견해가 다를 수 있겠으나. 이 시의 이면으로 들어서게 하는 단서는 8연 2행의 ‘지그시’가 아닐까 한다. 임종 직전인지 아닌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주 급박하기만 한 때에 어떤 감정이 고조되고 고조되어 그 극한에 이른 아버지[‘울아비’]가 아들[화자]을 그렇게 바라보는 모습, 아버지의 집중하는 시선과 짧다고 할 수 없는 그 시간을 우리로 하여금 주목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리하기 쉽지 않은 복잡하고 치열한 심경을 헤아리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미리 말해 이 심경이, 끝 연 ‘바쁜디 뭣허러 왔냐이’란 말로 대변되고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말은 아버지 심경의 일부라고 할 수는 있지만 결코 다일 수 없고, 심지어는 그 심경과 거의 무관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우리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지그시’에 관련된 심경을 모처럼 추정하게 한다. 우선 우리는 처음에 낯익었던 아내의 말을 아버지의 입장에서 어떻게 들었을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내가 자신의 ‘귀에 대고/못 박’듯 한, ‘인자 그만 가시오/자석새끼들 고상시키지 말고라우’란 그 말. 막무가내 처지에서 일리 있어서 ‘귀’에 순순하게 들렸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무척이나 거슬려 불길 짜증이 솟구쳤을 것이다.
‘자석새끼들 고상’을 잘 알고 아는 내게 왜 그 따위 이유로 ‘그만’ 죽으라고 하나. 아니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내가 더 살아보려고 그 ‘고상’을 외면한다고 여기나? 이 사람아 나도 죽을 것 같으면서도 죽지 못하는 내가 그때마다 힘들고 괴로운데 이런 나를 모른다고? 알면서도 뭐 어째...
다른 추정을 하는 독자들도 아버지의 이런 유감이 가능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5연, ‘울아비 저승 문턱 넘다 말고/두 눈 번쩍 뜨더니 ’와 6연, ‘링거줄 홱 잡아챘다’를 이상 맥락으로 고려해본다면. 다시 말해 5연은 아내의 그 말에 반발한 심정 묘사로 볼 수 있으며, 6연은 그 짜증에 기인한 반발 행위로. 물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다음 7연 ‘손등에 꽂힌 바늘이/핏줄 따라 파르르 흔들렸다’를 아버지 심정의 여운을 대유(代喩)하는 묘사로도 보면 그 가능성을 한층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8연에서 화자인 아들이 ‘깜짝 놀라’ 자신의 ‘손’을 ‘부여잡’아 주어서 아버지는 무척 기꺼웠을 것이다. 아 아들은 내 심정을 알아줄 뿐만 아니라 어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서. 그래서 직전의 울화도 아들의 손에 ‘부여잡’힌 자신의 ‘손’처럼 진정되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피부로 느껴지는 아들 손의 따뜻한 온기와 그 온기로 전달되는 염려와 애정으로 온 몸이 충전되면서. 그리하여 아내의 일리 있으면서도 얄미웠던 그 말도 새삼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바쁜디 뭣허러 왔냐이’라고 문득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 말은, 지 처자식 먹여 살리기에도 힘들고 바쁜 아들에게 자신이 늘 하던 말이며 진심의 배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반어일 수 있다. 아니 네 형편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 애비가 생지사지(生之死之)하고 있는데, 네 어미에게 나를 맡기고 어찌 이리 가끔 나타나느냐는, 말 못할 유감의 표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두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 아내가 사정에도 어울리지 않게 잔소리하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기에 맞받아 언쟁하게 되었고, 아무리 따져도 승복하지 않았는데, 아들이 나서서 어머니의 이런 말은 잘못이라고 하니, 아내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진화(鎭火)된 적이 있다고. 그런데 아들의 말은 자신들이 몇 번 했던 말에 불과하였다고. 그래서 우리는 궁금했다. 아들이 자신의 보람이고 남편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인가. 우리는 이를 자못 그럴 듯하게 여기면서도 만족할 수 없어, 자조하는 심정으로 결국 남편은 자신과 피가 다르고 남일 수 있지만 아들은 아니라서 그런가보다고 갸웃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부질없다며 웃었는데, 자신의 생각을 우선하며 언쟁하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노모가 한 말이 떠오른다. 결국 마음 편안하게 소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아내이고 남편이라고. 마을을 다니며 꽤 남편 비난을 하던 분이 남편 사후에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주 눈물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상황에 따른 심정 변이가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위 시 4연에서 혹시 “인자 그만 같이 갑시다”고 했으면 어떻게 될까. 그 이하 시행을 그대로 두더라도 6연을 그 거부의 의사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으면서 역시 거듭 읽는 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참견은 시인에게 엉뚱한 무례지만 이 시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이 시의 한 면모를 오히려 부각시킨다. 이 시의 이어지는 여백에 있는, 우리 누구도 모면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일생을 달관 비슷하게 풍유하는 취지를. 게다가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정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