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110)] 이분희 '짜장면'
짜장면
이 분 희
TV 화면 속 어느 마을에선
장마에
집들이 무너지고
농지가 매몰돼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데
인천국제공항 출입국장 로비에선
휴가여행 떠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장마도
더위도 무섭지 않은
씩씩한 며느리,
몸 불편한 시아버지
안방으로 피서를 와
이불 빨래 대청소로 찜질한다
화투패를 뜨시던 시아버지
웃으시며 한참 동안
방석 밑을 만지시더니
“얘야
오늘은 짜장면이 먹고 싶구나
두 그릇 시켜라”
꼬깃꼬깃 쌈짓돈을 꺼내 놓으신다
이분희 시인이 2011년 《한국시학》에 발표한 시, 「짜장면」의 전문이다. 한여름 장마철을 배경으로 하는 시이다. 오늘 아침 이 시를 읽으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두보의 시 강촌江村이다. 왠지 두 시가 묘하게 오버 랩 되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두보의 시를 보자.
淸江一曲抱村流/長夏江村事事幽/自去自來梁上燕/相親相近水中鷗
老妻畵紙爲棊局/稚子敲針作釣鉤/多病所須唯藥物/微軀此身更何求
굳이 요즘의 우리말로 바꾸어 보자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맑은 강 한 굽이는 마을을 안고 흐르는데
긴 여름 강촌은 일마다 그윽하기만 하구나
저 스스로 가고 오는 것은 들보 위 제비요
서로 친하고 가까운 물 가운데 갈매기로다.
늙은 아내는 종이 위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놈은 바늘을 두들겨 낚싯바늘을 만드나니
많은 병에 요긴한 것은 그저 약뿐인데
하찮은 이 몸이 무엇을 더 구하랴
시인이 49세 되던 해에 중국 성도에서 지었다고 하는 칠언율시이다. 서기로 761년이다. 안록산의 난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사사명의 난이 나기 두 해 전이다. 두보는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그곳에 기거하며 모처럼 한가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이다. 시 전반에 그런 유유자적과 안분지족이 흐른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면 시대의 정곡을 찌르고 현실에 적응치 못하는 자신에 대한 한탄이 배어 있다. 바둑판처럼 흑백으로 갈리어 싸우는 무리들과 곧은 바늘을 굳이 두드려 굽은 낚싯바늘을 만드는, 왜곡된 세태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서, 글을 적어야 하는 종이 위에 아내가 바둑판이나 그리고 곧아야 하는 바늘이 굽어져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비탄이 숨어 있다.
이분희 시인의 시 「짜장면」도 전체적으로는 지극히 한가로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다시 보면 그 속에는 묵직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수많은 이웃이 수해로 당장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시국에 나 몰라라 하고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현대의 이기적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장마도/더위도 무섭지 않은/씩씩한 며느리’라고 했지만, 이 역시 반어로 볼 수도 있다. 왜 가사 노동이 주부만의 몫인가. 남들은 비행기를 타고 시원한 것을 찾아 떠난다는데 ‘몸 불편한 시아버지’와 ‘이불 빨래 대청소로 찜질’을 하는 노동이 과연 피서인가.
그래도 너무 비틀어 생각을 할 일만도 아니다. 시아버지가 과연 짜장면이 먹고 싶었을까. 염복 더위에 땀 흘려 일하는 며느리에 대한 배려이다. 쌈짓돈은 지갑에서 꺼내는 빳빳한 돈이면 쌈짓돈이 아니다, 깔고 앉은 방석 밑에서 꺼내는 꼬깃꼬깃한 돈이라야 제대로 쌈짓돈의 맛이 난다. 그런 위안이 힘들어도 살맛 나는 세상을 유지해 준다.
어제는 김애자 시인이 나 혼자 자판과 씨름하는 출판사에 오셔서 양장피와 짜장면을 사주고 가셨다. 오늘은 함께 복달임을 하자고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래, 충분히 살 만한 세상이다.
이분희 시인
『문예비전』으로 등단
경기시인협회, 수원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