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78)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박경리(1926-2008) 선생의 시를 또 읽었다. 사마천(司馬遷 : B.C.145?~B.C.86?)처럼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 천도는 과연 옳으냐 그르냐)”를 화두로 인고의 세월을 『토지』 집필로 지탱하며 ‘잠이 안 오는 밤’에는 ‘바느질’을 했는데, 낮에는 짬을 내 텃밭을 가꾸었다. 이 또한 일상의 주요 마디이면서 자신의 심신을 보양(補養)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음 시에서 볼 수 있듯, ‘배추’를 돌보며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도 각성하며, ‘나는 외롭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대추나무 밤나무 잣나무
잎새들 다투어 떨어지고
하마 오늘밤은 서리 내릴라
낙엽 쌓인 밭고랑 누비며
살며시 정답게 배추 보듬어
짚으로 묶어준다
목말라하면 물 뿌려 주고
푸른 벌레들 괴롭히면
돋보기 쓰고서 잡아 주고
떨어진 낙엽 털어 주고
폭폭 흙 파서 거름 묻어 주고
배추의 입김
살아있는 것의 가냘프고
때론 강한 입김 느끼며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여름 한 철 나는 외롭지 않았다
- 「배추」/박경리
서리 내릴 환절의 조짐에 시인은 ‘배추’를 ‘보듬어/짚으로 묶어준다’. ‘물 뿌려 주고’ ‘벌레들’을 ‘잡아 주고’, ‘낙엽 털어 주고’ ‘거름 묻어 주고’ 했던 일의 연속인데, 방한 준비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도 하나같이 ‘살며시 정답게’ 그랬다고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시인의 이 태도가 자신의 일을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고 천천히 진행하는 수행(修行)으로 여기며, 또 대상과 교감하고 교류하겠다는 유대의 자의식에서 형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4연의 결미 ‘여름 한 철 나는 외롭지 않았다’는 토로는 그 관련 귀결일 것이다. 즉 시인은 자신이 고독하였으나 그래서 고독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배추와 보낸 한 철만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일생이 그러했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기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었기에. 어떤 처지와 갈등에서도 진정 외로울 수는 없으리.
게다가 우리는 더 주요한 국면, ‘배추의 입김/살아있는 것의 가냘프고/때론 강한 입김 느끼며’를 음미해보아야 한다. 이 ‘입김’은 세계의 옳은 질서에 진정 동참하여야 느낄 수 있는 오묘한 ‘생명의 기운’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향유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향유할 수는 없는.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그 향유가 초래한 시인의 이치 각성으로 우선 볼 수 있는데, 시행의 상태와 맥락을 더 생각해보면, 배추가 시인 자신에게도 그런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시인이 느낀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이 ‘마음’은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라고. 그래서 시인은 동반이 함축된 ‘나는 외롭지 않았다’라는 토로를 한다고.
사족 삼아 이 ‘마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더 읽고자 한다.
육십 고개 넘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
바라보며
사랑 노래 부르는 친구
가을의 잔영 드리우며
물결치는 눈동자
친구여
이 세상 온갖 사랑 중에
남녀의 사랑이란 한 부분
그는 놀라 나를 보네
부용꽃 떨어지는 시간만큼
침묵이 흐른 뒤
그건 그래,
낮은 목소리
삼키는 한 숨 소리
- 「사랑」
‘육십 고개’를 넘었어도 지난 청춘의 못 다한 연정을 회고하는 친구, 그의 ‘가을의 잔영 드리우며/물결치는 눈동자’는 우리의 눈동자도 그렇게 물들여 흔들리게 하면서 연모의 ‘보이지 않는 곳/바라보’게 한다. 그런데 3연에서 시인은 그런 친구에게 ‘이 세상 온갖 사랑 중에/남녀의 사랑이란 한 부분’이라고 한다. 왜 동정하지 않고 그랬을까. 친구의 그 모습이 딱한 미몽이라서 우정의 찬물을 뿌려준 것인가. 4연, 특히 그 결미, 시인이 마지막으로 친구의 반응을 묘사한 ‘삼키는 한 숨 소리’에, 시인의 복잡한 마음도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정의 참견이라면, 친구의 ‘낮은 목소리’의 동의로 마쳐도 무난한데, 시인이 친구의 그 미련마저 묘사하는 것은, 시인도 한편으론 연정의 긴긴 애착을 인정한다는 취지가 이면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런 위로와 위안의 의사 역시 ‘기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박경리 선생의 시를 읽으면서 사마천을 거듭 떠올린다. 경서에서와 달리 이 세속에서는 이해가 시비를 앞서기 쉬운데, 대놓고 이해가 시비를 앞서면 이해가 시비를 농락하고, 불의가 정의를 훼손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마천은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라고 질의했으며, 비애와 분노가 점철되어 있다. 『사기』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지로 역사를 평가하며 저술한 기록일 것이다. 사마천을 의지하며 쓴 박경리 선생의 『토지』 역시 우리 근현대사에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누구도 사마천처럼 세속의 혼란을 보고 그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누구도 ‘살아있는 것의 가냘프고/때론 강한 입김’에 생육과 사랑의 천도(天道)가 작용하고 있다고 함께 느끼며 그 길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니.
참고로, 선생의 사위 김지하(1941-2022)는 주지하듯 감옥 독방에서 절망할 때 돌 틈에서 자라나는 어린 풀을 보고 생명운동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 면모는 선생의 「배추」에서의 사연과 비슷해 주목을 끈다. 김지하는 생명운동을, 반전, 평화, 환경과 생태보존, 생활협동조합 등 구체 실천세목으로 제시하며 이 세속을 변혁하자고 했다. 그 장모에 그 사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스라엘 사망자 1190여 명, 부상자 수천여 명, 팔레스타인 사망자만 7만3천여 명, 부상자 17만 4천여 명),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양측 사상자 200여 만 명), 북과 남의 막막한 대립, 국내 좌우의 반성 없는 갈등. 너무 새삼스럽지만 증오와 불통으로 상대를 말살하려는 몰염치한 이해의 기도(企圖)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두 분의 생각을 우리 더 군말 말고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정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