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흔하게 접하는 풍경이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사람들은 삶이 더욱 각박해지고, 경제위기를 겪는 요즘이 그때라고 말한다. 가정이나 직장, 사회에서 속상할 일도 많고, 스트레스받는 일도 많은 요즘.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우리 이웃의 '검은 비닐봉지'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가 힘겨운 일상 속에서 '쓰린 속'을 달랜다.

수원 권선구에서 광역(좌석)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구 서초동으로 출퇴근하는 모 IT벤처기업 대리 신 모(33) 씨. “제2의 외환위기, 미국발 금융위기에 부도기업 속출, 환율 급등, 서민가정 파탄 등등…”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위기 타령’에 한숨만 늘었다. 거래처의 자금 사정으로 계약 성사한 프로젝트도 물거품이 되면서 요즘 술자리가 부쩍 늘었다.
지난 28일도 술자리를 마치고 7001번 버스에 오른 신 씨는 이날따라 속이 부대꼈다. 집살 때 빌린 대출 원리금을 다음 달부터 내야 하는데 연봉은 동결됐고, 결혼 1년 만에 아내가 임신마저 하면서 생계유지의 막막함에 급하게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울렁증’이 심해졌지만 달리는 버스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토할 곳을 찾던 신 씨는 버스 천장 손잡이에 달린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버스기사가 술에 취한 승객이 혹시 구토할지 몰라 달아 놓은 구토용 봉지였다. 금세라도 토할 것 같았던 신 씨였지만 구토 대신 봉지에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세상살이가 갈수록 힘들어져 자꾸 술에 의지하게 돼요. 술을 마셔 울렁이는 것이 아니라 내 초라한 주머니 사정과 경제위기를 몰고 온 정부를 원망해 울컥했죠. 결국, 이런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최근 신 씨처럼 구토 비닐을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심야 광역버스를 운행하는 버스기사들의 입을 빌리자면 1대당 1주일에 3~4건씩은 발생하고 있다. 비닐봉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역한 냄새로 피해를 주고, 청결에도 좋지 않아 여객회사나 운전기사가 직접 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7770번 김희숙(여) 운전기사는 “심야 때 술에 취해 비닐봉지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더러 있다”면서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 화도 내고, 눈물도 흘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특히 그는 “버스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등을 두드려 주는 풍경도 더는 낯설지 않다”고 했다.
‘주정뱅이’들을 위한 변명으로 치부할 법한 일이지만, 나름의 사정을 들어보면 술 때문만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구토 봉지를 이용해 봤다는 대학생 최 모(20·여·건국대) 씨도 “아버지가 명퇴하고서 비싼 대학등록금과 생활비 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했다”면서 “속상한 일만 잔뜩 있는데 술을 들어부으니 탈이 나지 않겠느냐?”고 했다.

● “속 풀어주는 세상, 따뜻한 정을 담아낸다”
“속상한 일이 많은 요즘이지만, 빈속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일도 있어 아직은 살만한 세상 아니겠습니까?” <남수원로타리클럽 이석민 재단위원장>
29일 오전 11시30분께 팔달구 팔달문 인근 관광안내소 앞. 200여 명의 어르신이 ‘효행 무료급식’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은 급식소에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대부분 독거 어르신들이다. 우거지와 쇠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 우거지탕에 따끈한 밥을 푸짐하게 퍼 담은 식판을 받아 든 어르신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다섯 번째 음식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전준열(72) 할아버지는 “이렇게 끼니를 때우고도, 집으로 갈 때 남은 밥과 밑반찬도 '검은 봉지'에 싸준다”면서 “요즘같이 어려울 때 이렇게 해주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수원갈비문화원이 주최하고, 남수원로타리클럽이 후원하는 어르신 급식행사가 내심 흡족한 모양이다. 어르신들끼리 서로 등을 두들겨 주며 “많이 잡사요”라고 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3년 전부터 남수원로타리클럽 회원과 사단법인 한국BBS 수원시지부 회원이 참여해 매달 마지막 주 한 번씩 행사를 열고 있다. 급식소 운영은 따로 날짜를 지정하지 않아도 급식 당일 어르신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때문에 무료급식 한 번 하는데 만도 50만 원의 음식재료비가 들어간다.
김 위원장은 “첫 번째 무료급식행사 땐 수원갈비를 홍보하려고 시작했는데, 잇몸이 부실한 어르신을 보면서 홍보가 아닌 따뜻한 밥을 지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비록 밥 한 그릇에 불과하지만, 어르신들의 기뻐하는 모습에 보람을 찾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