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 39-40)
그날 나는 줄리와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줄리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시내에서 일어난 폭발사고 소식을 듣게 되었고, 사고가 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안전한 곳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복도에서 줄리의 시신을 찾아내었다.
어린 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167명의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이 사고가 살인을 위해서 사전에 모의된 폭탄테러였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나는 증오심으로 버텨 나갔다.
팀 멕베이와 테리 니콜스가 체포되었을 때 나는 그런 짐승같은 놈들도 곧바로 처형하지 않고 재판을 받는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그들의 처형을 공개적으로 부추기는 일을 했다.
폭발사고 있은 지 네 달쯤 되었을 때 나는 TV를 통해 최근 수사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면에 땅딸막한 백발의 남자가 몸을 숙이고 있는 모습이 잡혔을 때 나는 화면이 지체되어서 화가 났다.
“오늘 버팔로의 카메라맨들이 팀 멕베이의 아버지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기자가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어떤 것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TV를 끄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내가 TV 스위치를 끄기 전에 그 사람은 고개를 들더니 곧장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나는 단지 그의 얼굴을 흘깃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에게서 깊은 고통의 표정을 보았다. 나의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오 하느님, 이 사람도 저처럼 자식을 잃었군요.”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번쩍 지나가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과 고통의 표정은 계속 내 마음에 되살아났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내 자신의 고통도 변함이 없었고 그칠 줄을 몰랐다.
멕베이가 처형당해도 내 고통은 끝나지 않으리라는 갑작스럽고도 분명한 깨달음. 나는 멕베이의 처형을 주장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사고가 난 지 3년이 되었을 때였다.
버팔로에 있는 한 수녀님에게서 초청장이 왔다. 버팔로라는 지명을 보는 순간 나는 팀 멕베이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줄리를 죽인 놈의 아버지를 만난다고? 그것은 나 자신에게 너무나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하지만 줄리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버팔로에 있는 한 작은 목조 가옥의 초인종을 누르게 되었다. 내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나타났고 우리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정원을 갖고 계시다면서요? 저도 농장에서 컸죠.”
우리는 집 뒤로 걸어가며 30분 정도 잡초에서부터 뿌리덮개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는 서로 버드와 빌로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나를 집 안으로 데려갔다. 가족사진이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잘 생긴 소년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진을 내가 뚫어지게 보고 있음을 그가 눈치챘다. “팀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이에요.” 그는 간단히 말했다. “참, 잘 생긴 아이로군요.”
미처 입을 막을 틈도 없이 그 말이 튀어나왔다. 빌도 그의 눈에 가득찬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의 둘째 딸인 24살 된 제니퍼가 들어왔다. 내 딸 줄리는 24살이 되어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단번에 내 딸 줄리와 그 둘이 서로 뜻이 잘 맞았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거의 두 시간을 그 집에 머물렀다.
내가 떠나려고 일어서자 제니퍼가 나를 껴안았다. 줄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같이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제니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순간만큼 하느님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 내용은 미국 오클라마 폭파 사건이후, 월간잡지 가이드포스트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그 누구도 ‘막지 마라.’고 하셨으며 모든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도 예수님께는 모두 똑같이 사랑스러운 자녀들이다. 내가 알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지 그에게도 분명 나와 같은 아픔과 슬픔, 상처, 그리고 사랑이 있다.
어쩌면 그들과 화해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나 ‘이해’라는 거창한 이름의 행위가 아니라 그도 나와 똑같은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편견 없는 시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