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총영사 가와카미, 궁내 내신 비서관 모리, 만철이사 다나카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경관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910년 재판과정 중 고등법원 청취서에서 한,중,일 삼국이 동양평화회의체를 구성하고 삼국이 뤼순에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하여 삼국의 청년으로 구성된 공동군대를 창설하는등 한,중,일이 협력하는 공동체를 제시했다.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다를 수 있다.
하나의 유추해석을 위해 시대적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 안의사 의거 40여일전 9월7일 일본은 중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간도협약은 우리의 땅 간도를 일본이 중국에 넘겨주는 대가로 안봉철도의 개설문제, 무순, 연대의 탄광문제, 영구지선의 철수문제, 관외철도의 법고문 연장문제등 이권을 얻어냈다. 그러므로 간도협약은 우리정부가 간여하지 않은 가운데 취해진 불법적인 우리영토의 할양이었고 이 협약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국제문서인 것이다.
간도협약에 의해 고구려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주선왕조 500년 그리고 대한제국말까지 우리의 땅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실린 기록은 북간도가 역사적으로 우리의 땅임을 전제로 서간도는 고구려때는 졸본, 국내성 발해때는 솔빈부 땅으로 계속 우리민족이 살아온 터전이었고 여진족에게 잠시 빼앗긴 일이 있으나 고려 공민왕때 곧바로 수복하여 조선왕조 500년동안 줄곧 공지로 남아 있었다고 명시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도 조선조 경조때 까지도 국내성이 분명 우리 의주에 소속된 땅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며 1908년 편찬된 위의 ”증보문헌비고“는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대한제국 시기까지도 국내성에 한민족이 수만호가 들어가 살았음을 알려준다. 한편 청나라 성조는 봉금지역의 남방한계를 명백히 하기 위해 조선과의 국경선 확정을 위한 교섭을 전개해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 뒤 160여년간은 간도 귀속문제가 논의된바 없다.
1870년 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고 1881년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고 천국인이 간도로 이주하게 되자 간도영유권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문제해결을 위해 1885년, 1887년 양국간에 회담을 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간도에 1907년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다. 그랬던 일본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간도를 중국에 넘겨 준것이다. 우리땅을 빼앗은 일본이 우리의 고토인 고구려 땅마저 중국에 넘겨주니 그 죄상은 드디어 안중근의사가 주범인 이토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간도를 넘겨받은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우리의 독립을 도와주는 우방이다. 안중근은 “중국 너희는 간도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고싶은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그 답답함을 동양평화론으로 우회했을 것이라는 견해다. 오늘도 우리는 “간도협약을 무효라고”외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