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물과 생명은 나름대로의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인연으로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므로 이름 모를 풀 한포기, 쓸모없어 보이는 돌멩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요즈음 우리는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자연재해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두려운 마음으로 그런 환경이 아닌 이곳 금수강산에 태어났음을 고마워하게 된다. 우리의 근대역사에서 대지진이나 화산폭발 그리고 쓰나미 같은 큰 재앙이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거리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우리나라도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하니 그저 우리에게 그런 불행이 오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인지 난감하다.
그런데 지금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재해가 대부분 우리 스스로의 원인제공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과학적 견해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모든 벌어진 일에는 예외 없이 그 원인이 있다는 당연한 진리로 말미암아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대한 이산화탄소나 오존의 발생 등의 환경오염이 결국 지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은 이제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불교에서는 많은 계율 중에서 ‘살생하지 마라’는 것을 첫 번째로 여기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계율은 단지 ‘살생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죽음에 처한 생명체에게 다시 생명을 돌려줘야 한다’고 해석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방생(放生)’이다. 방생이란 복을 받기 위해 돈 주고 산 물고기를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은 모든 것들에게 생명을 돌려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친환경 녹색성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때에 우리나라 금수강산에서는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생명을 짓밟는 무모한 일들이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4대강 본류에서는 홍수가 난 일이 없었음에도 홍수방지라는 명목으로 수중보를 만들고, 4대강 본류의 수질은 이미 양호한 상황인데도 수질관리라는 명목으로 하천바닥을 준설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
홍수가 걱정되면 장마철마다 물난리를 겪는 곳이나 물난리 후 아직 복구가 되지 못한 곳을 돌보는 것이 순서지, 평소에 홍수걱정 없는 엉뚱한 곳에 보를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수질오염이 문제라면 오염의 근원이 되는 지방하천을 비롯한 상류지역의 철저한 관리가 우선이지 멀쩡한 모래톱을 뒤엎는 것은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우리 운하 만들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그나마 솔직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모두가 만족했다고 그토록 자랑하는 ‘청계천복원사업’이 진정한 복원사업이었을까? 사실 3·1 고가도로를 걷어내고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에 처음부터 7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찬성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두 손을 들어 찬성한 사람들이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은 ‘복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모습을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만드는 ‘훼손’ 때문이었음을 왜 침묵하는 것일까? 돌과 콘크리트로 뒤덮고 유지비용이 연간 수십억 원씩 들어가는 ‘청계천 복원사업’을 과연 역사가 어떻게 판단할지 안 봐도 뻔하다.
청계천이야 고가도로를 걷어내었기에 그나마 복원이라고 부른다 치더라도, 누나와 살고픈 강변의 금모래 은모래를 걷어내고 운동시설과 산책·자전거도로를 만들고 강변의 멀쩡한 기름진 농지를 물속에 잠기게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정말 궁금하다. 흐름이 둔해지고 모래톱이 없어진 강은 결국 썩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 강에는 오직 수천만 원짜리 로봇 물고기들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불교적 입장에서 4대강 사업이야말로 자연을 죽이고 우리의 미래를 죽이는 지독한 살생이다. 내가 삽질하지 않으니까 내 책임은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죽음에 처한 강에게 다시 생명을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살생’이요 ‘방생’이라는 책임감을 갖도록 하자. 이 순간 강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모든 분들에게 확고한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