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혜병원서 만세 외쳤던 수원 기생들

매홀칼럼= 이달순 (수원대 명예교수, hellosports.net 발행인)
해방 후 어윤희, 권애라 등이 최초 여기자인 최은희 사필가에게 증언해준 내용을 옮겨본다.

1919년 3 ·1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수원에서는 3월 25일 일반 청년과 학생의 주동으로 수원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 뒤 31일까지 파상적으로 일어났으나 대규모는 아니었으며 다만, 3월 29일 수원 기생조합 일동이 수원 자혜병원 앞에서 벌인 시위로 인해 크게 기세를 떨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수원 기생조합 취체역인 김향화(金香花)는 미리 기생들과 짜고 자기들이 들고 나갈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29일 오전 11시 그녀들은 조합에 집합, 한 달에 두 번씩 검진을 받게 되는 그 규례에 통과하기 위해 수원 자혜병원을 향해 출발하면서 김향화의 선두 지휘로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했다.

수원경찰서 앞에 이르자 잠시 행진을 멈추고 더욱 고함을 질러 만세를 불렀다. 그녀들은 거기서 발길을 돌려 수원 자혜병원 정문 앞에 와서 또다시 크게 만세를 외치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순사들은 병원으로 추격, 일본 의사는 검진을 거절했다. 이 소문은 화살처럼 빠르게 수원 성내에 퍼졌다. 의사는 진찰소 밖으로 내몰고 일경들은 그녀들의 팔을 잡고 연행하려고 승강이를 했다.

어느덧 학생, 상인, 노동자, 일반인들이 병원을 에워싸고 만세를 불렀다. 기생들은 힘을 얻어 병원 안에서 만세를 부르며 순사들을 떠밀고 밖으로 나오려 몸부림을 쳤다. 군중들은 기생들을 저지하는 경관들과 맞섰다. 끌거니 밀치거니 하는 북새통에 기생들은 전부 병원 밖으로 빠져나왔다.

군중은 기생들을 옹위하고 행진하며 개가를 부르듯 신이 나서 만세를 불렀다. 팔달산을 메아리치는 만세소리에 도처에서 군중이 모여들어 합세했다. 격양된 일부는 일인 상점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운동이 자못 치열했다.

경찰서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수원소방조합을 동원했다. 일인 소방수들은 (소방펌프를 손수레에 끌고 다니던 때) 조선인 소방수를 재촉해 골목까지 쫓아 들어가 전부 해산시켰다. 그날 밤 김향화는 구속됐고 군중들은 석방시위를 했다. 김향화의 본명은 김정일(金貞一)이다.

그녀가 체포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구형에 6개월 판결언도를 받고 복역하던 중 개성만세사건으로 역시 징역 6개월의 판결을 받은 권애라(權愛羅)와 같은 감방에 있었다. 권애라는 파격적인 여성이었으므로 향화에게 저녁마다 자기가 개성사람이니만큼 ‘개성 난봉가’니 ‘평양수심가’니 타령들이며 여러 가지 노래들을 배워 익혔다. 그녀는 향화에게 “기생 웃길 간다”는 칭찬까지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기생이 부르는 노래는 여염 부녀자들은 입에도 답지 못하던 시대였다. 권애라는 출옥 후에도 곧잘 큰 소리로 연습을 했다. 한 번은 그녀가 어느 단체 초청연사가 돼 종로 청년회관에서 강연을 하다가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미와’에게 중지를 당했다. 그들은 조금만 귀에 거슬리면 “주의!”하고 소리를 질렀고 “주의”를 세 번 거퍼하게 되면 으레 “중지!”하고 소리를 질러 연사의 하려던 말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하려던 말을 못 다하고 단에서 내려오게 된 권애라는 화풀이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전날 서래모감옥에서 김향화에게 배워 익힌 ‘박연폭포’를 한 번 길게 뽑아 넘긴 다음 복역 중에 자기가 작사했던 “발가벗길 때 피눈물 나더라만 콩밥 받으니 올 웃음 씨게 있네”하는 노래를 우렁차게 불렀다. 청중은 “걸작이다”하고 박수를 보내줬으나 경찰은 풍기문란이라 해 종로서에 29일간의 구금처분을 했다.

일제 폭압시절에 살았던 이들 여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편안한 오늘을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우린 지금 나라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면서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