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즈음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함께 쓰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 또한 나혜석이 최초다. 첫딸의 이름이 김나열이다.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 태어났다고 해서다. 여성해방과 여권신장을 외친 여성운동가로 최초가 된다. 여성이 이혼했을 때 재산분할권과 면접권을 요구한 것 또한 최초다.
결혼을 안한다고 학비를 중단하자, 나혜석은 귀국해 1년간 여주보통학교에서 미술강사를 해 번돈으로 다음해 일본으로 간다. 대학생 아르바이트 최초가 된다.
또한 근대여성으로 최초의 문화인물이기도 하다. 최초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접어둘 수 없는 것이 최초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혜석은 3·1운동에 가담해 5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나혜석의 처음 이름은 ‘명순’이다. 진명여고 졸업시 ‘혜석’으로 개명했다. 개명의 이유는 나홍석, 나경석과 같이 오빠들의 이름 항열에 준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있은 2년 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호적의 전신인 민적제도가 생겼을 무렵엔 여자들의 이름이 없을 때였다. 당시 민적에 여성의 이름은 백성여, 최성여 등 최씨 성을 갖은 여자, 백씨 성을 가진 여자라고 등재하기도 했다.
이때 나혜석은 ‘나아기’라 돼있다. 어려서는 아기씨, 좀 커서는 아가씨, 시집가면 새아씨, 좀 있으면 아씨, 며느리를 보면 마님이라 하던 시절이다. ‘나아기’라고 민적에 올린 것은 이름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모든 여성의 이름이 없던 시절이라 그런 것이다.
나혜석은 최우등으로 진명여고 3회 졸업생이 되면서 그 뛰어난 성적이 신문에 보도된다. 이어서 유학 길에 오를 때 여성최초의 유학으로 신문에 보도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된다.
오빠되는 나경석이 아버지의 이해를 얻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한 것이다. 나경석은 유명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이때 춘원 이광수의 부인이 된 허영숙을 함께 유학 보낸다. 18세 유학생 나혜석은 1914년 11월 ‘이상적 부인’을 학지광에 발표해 당시 동경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학지광은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해공 신익희, 소월 최승구가 중심이 된 유학생들의 문학지다. 그 글 가운데서 혜석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여성의 이상형으로 보는 세태를 개탄하면서, 왜 여성에게만 희생을 강요하고 남성을 현부양부(賢父良夫)로 만들기 위한 교육법은 없느냐고 항변했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부덕(婦德)을 장려해 왔으나, 앞으로는 여성도 지식을 연마하고 기예를 익혀 무슨 일이든지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자”고 역설했다. <계속>
특별기고 = 유동준 회장 (정월나혜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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