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은 민주주의 큰 자산

매홀칼럼 = 이달순 (수원대 명예교수, hellosports.net 발행인)

올해가 4·19혁명 50주년이 되는 해다. 반세기를 맞이한 시점에서 4·19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왜냐하면 4·19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큰 자산이며 자긍심이기 때문이다. 

4·19 정치혁명은 밑으로부터 정치체제를 바꾼 것이다. 이승만 정치체제는 권위주의 시대였다. 이승만(李承晩)은 그의 이름대로 이(李)씨 조선을 뒤늦게(承) 이을(晩)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시절 그는 왕조국가인데 대통령을 선출하자고 했다.

임시정부시절에는 의원내각제 임정을 대통령제로 개헌하며 대통령이 됐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는 의원내각제 헌법을 하룻밤 새 바꿔 초대대통령이 됐다. 부산 피난시절,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될 인기가 없자, 전시에 지방자치단체선거를 하고 국회가 직선제 대통령선출제도 개헌을 하지 않으면 지방자치단체가 연합해 개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국회의원이 탄 퇴근버스를 헌병대로 연행하고 ‘닷벌떼 백골단’이라는 괴한단체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해 기어코 직선제로 대통령이 됐다.

한 표가 모자라는 3선 개헌헌법을 4사5입식 괴상한 숫자풀이로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됐다. 권위주의라기보다 이승만 왕조였다. 왕조정치를 아래로부터 뒤엎는 것이 민주혁명인 것이다. 위로부터 폭력으로 장면 민주정권을 빼앗은 것이 쿠테타인 것이다. 5·16쿠테타정권은 그들이 5·16혁명이고, 4·19는 의거라고 했다.

둘째, 4·19는 시민혁명이다. 혁명의 주체가 중간계층일 때, 시민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고교생으로부터 시작돼 대학생들이 주체가 된 혁명이기에, 그들의 부모가 중간계층 이상의 시민층이기에, 시민혁명인 것이다. 좌익 진보세력이 주장하는 민중혁명이 아닌 것이다.

셋째, 국가정책의 변혁을 가져온 혁명이다. 1956년 20차 공산당대회에서 러시아의 당서기 흐르시초프는 평화공존연설을 하고 1959년 미국대통령 별장 ‘캠프다비드’에서 미소정상회담을 하니, 국제정치가 냉전시대에서 해빙의 시대, 긴장완화의 시대로 변화를 가져오는 시점에서 이승만은 북진통일만을 국가정책으로 고집하고 있으니, 국제정세는 이승만을 거세해야만 했다.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관대하게 대해주고 학생대표들을 경무대로 데리고가 “3·15부정선거를 다시 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박사가 하야해야 합니다.” 그 해 결국 하야성명을 얻어낸 것이다. 미국 그리고 미군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넷째, 국민들을 탄압하고 우롱하던 관료정부에 본때를 보여준 혁명이다. 자유당 말 신두영 국무원사무국장은 국무회의에 참석 1958년 1월부터 60년 7월까지 315회의 국무회의 토의내용을 미농지 2005장에 담았다. 57년까지 국무회의록은 없었다. 4·19 이후에 이 자료는 소각될 뻔했으나, 김기석 비서관이 잘 보관하고 있었다. 수원대학교재단 이사장 때, 그분의 옥고가 필자의 손에 들어왔다.

그 자료를 정리해 경향신문 박석흥 편집위원과 공동으로 1990년 4월 19일부터, 그러니까 20년 전 오늘부터 연재해 이듬해 3월까지 30회에 걸쳐 매회 전면 1페이지에 게재했다. 그 비망록은 현재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고 필자가 가진 사본은 수원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리고 기록의 일부는 나의 저서인 ‘이승만 연구’에 실려 있다. 이 비망록에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과 각 장관들을 발언이 기록돼 있다.

야당강연회를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장충공원에서 방해한 일, 경향신문 폐간 사건, 조봉암 사형의 건, 국회의원 데모, 보안법통과 때 무술경위동원사건, 3·15가 터지자 공산당원의 계략이라고 한 것 등이다.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고 데모가 다시 커져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보고를 받고 이 대통령은 “어린아이의 죽음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이 커져 정부의 책임문제가 떠오르면 내가 물러나야 할지 연구들 해보라”고 하자, 한 국무위원은 “공산당의 책동을 잘 수사해 상세히 이를 밝히고 차근차근 국회에서 풀어나가면 별일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통령을 안심시키는 글을 보면 자유당 국무회의가 전형적인 관료정치였음을 보여준다. 정찰관료정치의 타파가 4·19혁명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이러한 큰 자산 위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