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 지략가 부재의 안타까움

매홀칼럼= 이달순 (수원대 명예교수, hellosports.net 발행인)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953년 7ㆍ29 휴전협정의 주역은 G.케넌이었다. 미국무성 정책기획 참모국요원 마샬이 사전준비를 마치고 중공으로 출발한 것은 1951년 5월 초였다. 보안상 배편으로 마닐라를 떠나 홍콩에 도착해 반도호텔에 투숙한 마샬, 체이스와 슐타이즈는 '장국도' 대공보 사장인 초우, 중공 의정원의원인 챵시챠오를 만났으나 북경정부와의 직접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마샬이 그들의 만남이 신뢰할 만한 관계를 수립하려는 구상이 미국의 관리로부터 승인받았다는 점을 마지막에 만난 중공대표에게 다짐해줬어야 했다. 오히려 마샬이 미국의 공식대표라는 것을 숨기려했고, 북경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중공이 휴전을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그 마음의 문을 열도록 만들지 못했다. 

북진통일만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휴전이 눈앞에 닥친 1953년 6월 17일 북한으로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약 2만6000명을 과감히 석방했다. 그의 결단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국의 처칠은 자유세계에 대한 반역이라고 비난했다. 아이젠하워도 격노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한때 이승만을 구금하고 남한을 미국의 군사정부아래 두며 휴전에 동의하게 만들려는 '비상대비작전'을 검토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이 휴전협정의 체결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그가 1953년 봄 이후 줄곧 요구해온 한ㆍ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및 대한경제원조를 약속했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결국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손을 들었고, 휴전협정의 체결을 막아온 마지막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리해 공산군측과 UN군의 정전협정이 이뤄진다.

미국으로서는 휴전외교에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애치슨은 미국에 와있는 러시아 UN대사 말리크와 교섭하기 위해 미국에서 가장 박식하고 경험이 많은 관리 리프만과 당대 전 세계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G.케넌을 선정했다. 이들은 뉴욕근교 롱 아일랜드의 글랜코브에 있는 말리크의 빌라를 방문했고, 두 번 회담을 가졌다.

밀담의 경위로 볼 때 말리크는 노회한 케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실제로 더 다급했던 쪽은 미국이었는데 1951년 6월 23일 말리크가 휴전회담을 제의한다고 방송을 한 것이다. 이 라디오 방송이 나간 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는 방송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휴전회담은 이렇게 해서 진행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대등한 조건이라면, 러시아와 끊임없이 협상을 주도해야 한다고 판단한 G.케넌은 휴전의 주역이 된 것이다.

G.케넌은 2차대전 후 냉전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고 지략가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처칠의 '철의 장막' 역설이 있자, 주 러시아대사관의 외교관으로 봉쇄정책과 냉전계획을 긴전문(Long Telegram)으로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리고 마샬플랜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유럽부흥프로그램으로 세계를 미국 즉, 자유세계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대서양기구를 형성 성공하에 12개국으로 조약을 성립시켜 동맹국으로 묶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러시아를 향한 봉쇄정책을 입안해 냄으로써 냉전의 시대를 입안한 외교적 전략가로 부각된다. '냉전'이란 용어는 바로크가 만들어냈는데 시사평론가 W.리프만이 칼럼 제목으로 인용해 널리 사용하게 됐다. 그 뒤, 1951년 1월 12일 애치슨국장장관이 발표한 아시아 방위선도 G.케넌의 입안이었다.

현재 한국과 리비아의 외교마찰을 보면서, 천안함사태 이후 우리나라가 펼친 외교전을 보면서  왜 우리나라에는 G.케넌 같은 외교적 지략가가 없는지 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