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병합의 원인은 '국민의 불신'

매홀칼럼= 이달순(수원대 명예교수, hellosports.net 발행인)

8월 29일은 일제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원인을 되돌아 볼까 한다. 22대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나이 11세로 즉위했고, 정조의 유명으로 김조순이 정치를 보좌하게 돼 그는 자기의 딸을 왕비로 삼게 하고 왕비의 부친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노론의 안동 김씨 외척 세도정치 시대가 열렸다.

원래 세도(世道)라는 말은 유교적 정치사상에서 왕도 이상의 구현을 의미하는 것이 그 본이었는데, 이제 세도(勢道)정치는 제도상의 최고관리자가 아니라, 국왕의 신임을 다른 실권자가 정권을 휘어잡고 변칙과 횡포를 일삼는 일이 된 것이다. 세도정치에 의한 권력의 남용은 조선왕조의 절대주의적 관료체제를 붕괴시키게 되니, 이른바 3정의 문란으로 나타났고, 조선후기까지 연장된다.

마침내 26대 고종이 즉위하고 그의 부친 이하응이 운현궁에서 천하를 호령하게 되니, 이제 외척의 세도정치는 왕의 부친 세도정치인 대원군 독재정치의 양상이 출현했다. 대원군의 며느리이며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는 궁궐 깊숙이 들어앉아 왕권을 찾는 일에 힘을 쏟아 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원군의 몰락은 명성황후 세도정치를 이끌어 냈다.

어쨌든, 세도정치의 연속은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고 이때 동학운동이 일어났다. 동학사상은 기존질서의 타파와 신질서의 창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때 실학이 싹트고 구체적인 자유주의, 민주주의 혁명 사상을 널리 전파시키는 독립협회운동도 일어났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척족세도가들은 열강의 침략적 야욕 앞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 때, 대원군이 독재정치가로 등장해 강력한 통치를 했으나, 그는 국제정치에 눈이 어두워 결국 하야했다.

척족세도가들은 대원군파와의 적정감시와 정적타도에만 눈이 어두워 벌떼같이 일어나는 정권의 불신 속에서 3남일대의 민란 등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해 지방농민들의 수령을 배격하는 민란은 병란의 성격을 띠게 됐다. 고종은 무능했고, 명성황후파들은 정권욕에만 사로잡혀 이러한 무능, 무기력은 국민의 정치불신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정적을 꺼려 척족의 의견이 아니면 들어주지 않는 폐쇄성과 독점성만을 철저히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전통이었다고 볼 수 있는 상소로 좋은 의견을 제시한 자에게도 그들에게 비위가 거슬린다고 툭하면 처형하는 폐쇄성은 너무나도 심했다. 더욱이 동학이나 독립협회의 개혁요구는 묵살되고 국민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점점 심해져 갔다. 고구려의 멸망원인도 이와 같다. 독재자 연개소문의 세도정치와 그에 따른 민심의 이반 및 사회기강의 문란, 그리고 아들 간의 권력투쟁 등이 멸망의 주원인인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출발부터 5부족이라는 다부족 국가였으며, 방대한 지역에 분포된 부여, 말갈, 돌궐, 거란족 등을 포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과의 관계는 국가정세가 안정될 때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고구려 정세의 불안으로 이들 세력이 이탈됨으로써 국가의 응집력 또는 융합이 무너진 것이다. 물론,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은 우리의 경제적 궁핍과 외교적 무지, 그리고 군사력의 약세, 근대문명화의 거부 등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 세도정치에 대한 불신임이 틀림없다.

최근 우리나라 국민도 가장 불신하는 것이 정치이다. 2010년 우리 국민은 현명했다. 6ㆍ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대승은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투표로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을 대패시키고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야당에 대한 정치불신을 표로 보여준 것이다. 어떤 면에서 국민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어느 쪽도 믿지 못하겠다는 의사표시일 수도 있다. 북한이 우리에게 도전적이고, 중국이 북한을 돕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 국민이 이처럼 정치를 계속 불신하게 되면 우리 국가의 장래는 밝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100년 전 강제병합의 역사가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