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모든 기관의 재정위기는 단체장들이나 정치인들의 성심성 사업전개가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 물론 국가의 감세정책, 부동산거래세감소, 지방세감면정책도 또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기활성화를 위한 지출확대, 사회복지 지출증가, 국고보조금에 맞춰 늘려야 하는 지방대응비 증가 등 세출이 늘어난 점도 다른 이유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난 가운데서도 선심성, 인기성, 명분성 건설사업은 계속되고 있고 더욱이 공기업 등에서는 적자 운영 속에서도 임원들을 비롯한 보너스 지급이 과대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말하자면, 나라가 온통 빚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중앙정부의 통제도 믿을만하지 않다. 차제에 '국채보상운동'이 생각난다. 일본은 1905년 회계부족을 구실삼아 동경에서 공채명목으로 200만환을 모집해 오게 하고 이 시기에 화폐 정리 자금이라고 해 일본 제일은행에서 300만환을 차입하고, 그 해 11월에 민간금융을 위한 자금이라고 해 일본정부에서 150만환을 차입하게 했다. 또 1906년 기업자금이라는 명목으로 1000만환은 100만환의 선이자를 떼고, 실상은 900만환의 현금을 받은 것이다.
때문에 국채 총액은 1300만환에 달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정부는 차용증서만 써주었을 뿐이지 현금은 저네들 손에서 꿩먹고 알먹은 격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거액의 채권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발목을 점점 쇠사슬에 얽어매어 영영 국권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된다. 1907년 대구 광문사사장 김광재와 그의 향우인 동지 서상돈이 우선 담배끊기운동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황성신문' 주간 장지연이 '단연보국채(담배 끊어 국채 갚자)' 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썼다. 고종황제가 "나도 국민과 더불어 담배를 끊겠다." 했고, '대한매일신보'에 이 기사가 실리자 '국채보상회'가 조직되고 전국에 파급돼 서울과 대구의 부인들이 은가락지 뽑아 나라에 바치겠다하는 '국채보상부인회'가 전국적 규모로 조직 발전하게 됐다. 부산부인회의 취지서 한 대목을 소개한다.
'나라가 있은 뒤에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은 뒤에 나라가 있는지라. 국채 1천 3백만환을 갚지 못하면 우리 대한강토 3천리를 보전키 어려워라. 베트남과 이집트는 외채로 국토를 겁탈당하고, 인민이 진멸하니 진감불원이라.' 국채보상운동은 실로 우리 민족이 한마음 한 뜻으로 거국일치 총궐기한 것이었다. 신문이 앞장서 중대한 역할을 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은 전국방방곡곡으로 파급됐다.
1908년 일본인들은 의연금의 수합을 취급해 오던 '대한매일신보'를 타도하는 책략으로 거국적으로 진행되던 국채보상운동이 서리를 맞아 좌절의 비운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나라의 빚을 갚기위해 금반지를 빼내는 우리의 전통은 IMF 때에도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부라고 하면 재벌기업이나 부자들만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우리나라 기부금 총액의 60%는 기업이 내는 돈이다. 그것도 법인 이름으로 내는 돈이지 재벌총수가 자발적으로 개인재산에서 내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월 1만~2만원씩 후원금을 내는 풀뿌리 개인기부가 늘고 있는 현상은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다. 최근 몇 해동안 개인기부자 100만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기부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이 어느새 몰라보게 성숙됨을 보여준다. 차제에 사회복지공동모금, 기아대책 월드비전, 어린이재단 같은 후원단체에 기부하는 것 못지않게 지방재정ㆍ공기업ㆍ국가재정의 파탄을 막자는 취지를 살려 '내고장, 내기업, 내나라 빚갚기' 의 운동을 전개했으면 한다. 이러한 단체의 탄생은 모금자체보다 고위공직자, 정치인, 지방자치단체장들과 함께 일반 국민에게까지 선심성사업 등 방만한 지출을 억제하고 수지균형의 예산운영에 힘을 쏟는 풍토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