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門을 열게 돕는 안내자

매홀칼럼= 수산스님(대승원주지, (사)불교사상연구회 이사장)

우리는 불교라고 하면 조용한 산사를 떠올리고 스님들은 참선만 하는 수동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잡아함경』이라는 초기경전에 의하면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출가한 싯달타 태자가 6년여의 수행 끝에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이 되신 후 다섯 명의 첫 제자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비구들아,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전도(傳道)를 떠나거라.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가르침(法)을 설해라. 그리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깨끗한 행을 설해라.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당시의 지명)로 가리라”라는 전도선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도의 목적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이라도 더 제도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같은 곳을 가지 말고 흩어져서 혼자 다니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더 많은 지역의 더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는 전법[傳法-포교, 선교]의 중요성과 사명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전 생애를 중생의 교화에 헌신하셨던 석가모니께서 각오와 진리를 설하는 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포교사로서의 용기와 신념’이 함축돼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께서 스승으로서 먼저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중생제도 포교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의 모습은, 많이 나아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수동적인 종교로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불교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포교하는 불교인이 돼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물론 적극적이라고 해서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함은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불교에 ‘일천제(一闡提)’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처음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중생’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즉, 온갖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아무리 수행을 하더라도 성불(成佛)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용어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변하더니 나중에는 ‘중생제도를 위해 일부러 이 사바세계에 와서 활동하므로 성불할 겨를이 없다’고 풀이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기에 누구든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석가모니 당시에도 부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존재했을 것이고,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들은 틀림없이 성불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믿음과 마음가짐을 갖고 있을지라도 누구든지 결국에는 부처가 될 수 있어야만 했는데, 그것은 『열반경』에서 주장하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가르침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결코 강제적으로 그들을 성불시키겠다고 나서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들의 시절인연을 기다릴 뿐이다.

요 며칠째 인터넷에서는 개신교의 지나친 선교활동의 모습이 동영상으로 올라와 큰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무릇 모든 종교의 가장 최우선적인 과제는 바로 포교-선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최고의 진리라고 할지라도 남들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문제는 나의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나의 믿음을 너무 강조하여 정복자의 자세로 나서는 것은 지나온 과거가 보여주듯이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기에 더욱 그러하다.

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법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님이나 법사가 우리에게 부처의 좋은 말씀을 전해주는 것을 ‘법문을 설한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때에 법문(法文)이 아니라 법문(法門)으로 쓰는데, 그것은 진리의 세계로 길 안내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각자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 확인하고 얻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석가모니를 ‘도사(導師)’라고 부르며, 이것은 바로 바른길로 인도하는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부처나 스님이 하시는 일은 문 앞에까지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열고 들어가서 무엇이든 얻는 것은 각자의 몫이며 그래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번뇌제거 작업 곧, 수행이다. 그러기에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간혹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 강제로 물을 먹이려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다. 그것은 오히려 고통이요 고문이 아니던가.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최소한의 양심을 잃지 말고 나의 좋은 것을 소개하려 한다면 적어도 법당에 들어가 찬송가를 부르거나 우상숭배를 탓하는 어리석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국가이다. 그러기에 더욱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마음과 믿음이 소중한 딱 그만큼 다른 사람의 마음과 믿음도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