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칼럼] 온국민과 소통하는 환경정책

김정섭 (환경예술가)

조선시대 태종은 억울한 백성의 호소를 직접 듣기위해 의금부 당직청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 관리하게 했다.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조선 초기, 그것도 서슬 퍼런 양반들의 권위가 백성의 목숨을 쥐고 흔들던 시절에 신문고를 설치해 뒀던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트위터에 열광한다. PC를 통한 의사소통의 시대는 이미 한물 간 듯 보인다. 싸이나 블로그도 이젠 트위터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또는 관심 있는 사람들과 팔로워를 맺고, 국적, 연령,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와 전 세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소식도 실시간으로 주고받는다. 이젠 네티즌이란 용어 대신에 트위터리안(Twitterian)이라는 용어가 대신해가고 있다. 바야흐로 소셜네트워킹의 시대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공통된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바로 소통(疏通)이다. 500년 전의 사람들도 그리고 현대의 사람들도 소통의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데 있어 소통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부간에 소통이 없으면 결혼생활에 불화를 겪을 수 있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대화가 없다면, 가족이란 공동체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가족해체의 지름길은 바로 소통의 부재(不在)이다. 내가 사회와의 소통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사회에서 소외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나 또한 자신과의 소통이 없다면 자신에 대한 정체성마저 잃게 될 것이다. 리더쉽을 가지려면 소통하는 법을 우선 배워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이전에 타인의 생각을 듣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환경예술을 하면서 소통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하는 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관람객들에게 보여준다. 이때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통한 예술가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과 열정에 대한 소통이 어렵다면, 그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그치고 만다. 그래서 예술은 소통이 무엇보다도 필요한데, 환경예술에 관한한 소통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환경에 대한 인식을 전달해야 할 대상들은 일부 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환경위기 대한 경고를 받아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을 느껴야하고 지켜나가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마시는 물, 숨쉬는 공기, 푸른 하늘 모두 우리가 지구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들에겐 환경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환경예술작업을 하면서 항상 시민들과 함께 소통하는 법부터 고민하게 된다. 시민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이러한 생각들을 전달하고 함께 느끼고 같이 행동할 수 있는가가 가장 큰 과제이다.

국가도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요즘 신문을 보면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국가가 추진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반드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들어주어야 한다. 숨기거나 막무가내로 밀어부처서도 안 될 것이다. 국민도 마찬가지이다. 무조건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만 높일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냉정한 태도로 정부와의 소통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단 정부가 말하는 백년대계를 위한 국책사업이라면 더더욱 정부와 국민과의 소통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국민이 나서서 소통을 요구하면 그것을 단절하지 말고 오히려 귀를 더 크게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국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한 정치를 이루어 나간다면, 정부와 국민이 원하는 진정 ‘공정한 사회’의 기반이 다져지고 우리의 산하와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신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