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호남벌을 호령한 의병장 심남일

전지해(수원보훈지청 보훈과)

가을 막바지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대둔산은 백두대간의 소백산맥 줄기가 호남으로 뻗은 노령산맥 초입에 있는 산이다. 그곳에서 눈에 띄는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운동 대둔산항쟁전적비’였다. 1984년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협해 갑오개혁을 단행하자, 반외세 반봉건 기치로 2차로 봉기한 동학 농민 혁명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남은 지도자들이 대둔산으로 들어와 최후로 항전했다고 한다. 단풍을 구경하러 대둔산을 찾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전적비를 발견하니 보훈처 공무원으로서 반가움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옛날 치열했을 항전을 생각하니 안타까움도 밀려왔다.

이날 본 전적비와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이 지역에 와 호남, 의병이라는 말만으로도 불현듯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호남벌을 호령한 불세출의 의병장 ‘심남일’ 선생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다. 우리 관서에서도 11월 한 달 간 게시된 홍보포스터 속에서 심남일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자라나는 세대들의 애국심 함양에 기여하고자 독립기념관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그분들의 생애와 사상, 공적 등을 집중적으로 홍보하고 있는데,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심남일 선생을 선정했다.

선생은 전라도 함평 월야면 정산리 출신으로 관직을 역임한 적은 없으나 학식이 있어 서당 훈장을 지내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날로 심각해지자 의병에 투신했다. 처음에는 기삼연이 주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는데 그러던 중 일제 군경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 의병장 기삼연, 김율 등이 차례로 순국하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불러 모아 1908년 음력 2월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선생은 의병 활동의 경험을 살려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시켰다. 그리하여 1908년 초 침체에 빠진 전남지방의 의병을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아울러 전남에서 활동하는 전해산, 안규홍 의병부대와의 연합의진(聯合義陳)인 호남동의단 결성을 주도해 연합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그들은 선생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해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 1909년 8월부터 2개월간의 토벌은 살육, 방화, 약탈, 폭행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돼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피살, 체포됐다. 1909년 10월 9일 선생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체포됐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10년 10월 4일 대구 감옥에서 사형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가 장밋빛만으로 채워질 수 없었기에 잊고 싶은 역사가 있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지난 한일축구경기에서 펼쳐 있던 플래카드 문구로 쓰여 시선을 잡아끌었던 이 말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에 어떤 각오를 다지게 했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조국수호의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후세의 우리도 하나 되는 대한국민으로 거듭나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나라를 지키고자 몸바쳐 희생한 순국선열들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며칠 남지 않은 11월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달의 독립운동가 심남일 선생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