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홀칼럼] 어리석은 피해의식

수산스님(대승원주지, (사)불교사상연구회 이사장)

옛날 어느 스승과 제자 두 스님이 길을 가고 있었다. 도중에 개울을 만나 건너려 하는데 얼마 전 갑작스레 내렸던 비로 물이 불어 허리까지 물이 차 있었다. 망설이다가 막 건너려고 하는데 어느 아낙네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친정에 다녀오는 중이었는데 물이 불어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날이 제삿날이라 빨리 집으로 돌아가 제사 준비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너무도 안타까워하는 아낙네를 보고 스승이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 줄까 물었다. 참으로 민망했지만, 상황을 따질 겨를이 없었던 아낙네는 그리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스승은 무사히 아낙네를 개울 건너에 내려주었다. 고마워하는 아낙네를 뒤로하고 스승과 제자는 다시 가던 길을 떠났다.

그런데 제자의 머릿속은 온통 스승이 아낙네를 업었던 장면으로 가득 찼고, 출가 수행자로서 여자를 등에 업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가다가 잠시 쉬게 됐을 때 제자가 스승에게 “출가 수행자가 여자를 등에 업는다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 아닙니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스승이 답하기를 “아니 나는 그 아낙네를 개울을 건너고 바로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녀를 업고 여기까지 왔느냐? 참 힘들었겠구나”라고 했다.

이상의 이야기는 불교 선가(禪家)에서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내가 마음에 대해 설명할 때에 자주 인용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불교의 선은 종종 이론과 논리를 뛰어넘는 파격으로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곤 한다. 스승이 비록 아낙네를 업었다는 것이 출가 수행자로서 옳지 않은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계율을 중요시하는 제자의 시각에서였지만 스승의 시각에서는 단지 곤란에 처한 중생을 도와준 것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개울 건너에 아낙네를 내려주고는 그녀를 도왔다는 사실조차 내려놓았던 스승이었지만, 제자는 내내 그녀를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힘들게 먼 길을 왔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지나친 걱정과 조바심으로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그 일이 한참 지나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하게 된다. 매사에 깊이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어느 때에는 지나친 생각이 집착돼 오히려 역효과를 보았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안정을 주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한다.

요 며칠 뉴스에서는 우리 정부의 연평도 해상사격훈련 방침과 그에 대한 북한의 보복공격 위협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자제요청에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보도되고 있다.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폭격은 그 어떤 핑계로도 설명될 수 없는 만행이었기에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특히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무엇보다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단호한 응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벌어졌으며 무슨 이유였든지 우리 정부의 단호한 응징은 그 타이밍을 놓쳤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잔뜩 벼르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 의문이다. 그것이 혹시라도 정부와 군의 안보 무능과 피해의식 내지는 자존심 싸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지금의 상황이 일각에서 우려하듯이 남북한 당국의 기 싸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일어날지도 모를 피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마음을 내려놓고 멀리 내다보는 넓은 시야로 생명과 평화를 가슴에 담아 보자. 우리는 위기가 아닌 대화를,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