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인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탄생했던 싯달타태자는 출가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고 석가모니(‘석가족(釋迦族) 출신의 깨달은 성인’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부처가 됐다. 그런데 여러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미 오래전에 부처가 됐지만, 이곳 사바세계의 어리석은 중생들을 제도해 주고자 일부러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이후에 우리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위해 다시 오실 부처가 바로 미륵부처님으로 이분은 지금 도솔천이란 하늘나라에서 때를 기다리며 그곳 중생들을 제도하고 계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나 미륵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일부러 우리의 세상에 오시는 부처님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생구제를 위해 일부러 우리에게 오시는 부처님 말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을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한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당신을 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목소리로써 나를 찾는 사람은 잘못된 도를 행하는 것으로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부처님의 참된 모습은 형상이나 음성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금강경’에서 “무릇 모든 겉모습은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겉모습이 진실한 모습이 아닌 줄 안다면 그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개인숭배를 철저히 금하셨던 석가모니께서 오늘날 이 땅에 오신다면 아마도 무척 놀라고 실망하실 것 같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찰의 수많은 불상을 보듯이,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그분만큼 개인숭배의 대상이 됐던 인물이 드물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 석가모니가 계신다면 결코 불상을 모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상을 단순히 ‘우상숭배’라고 치부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오늘날의 불상은 우리 인간의 모자라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절대 진리를 ‘법(法, Dharma/달마)’이라고 하는데, 이 법을 인격화한 것이 바로 ‘법신(法身)’이다. 부처의 모습을 가리키는 ‘법신’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른 모든 부처와 중생의 모습 자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부처의 모습은 불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의 근원, 부처의 본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번듯한 겉모습에 현혹돼 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홍수에 묻혀 있다. 아니, 스스로 참모습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정치인은 정치인의 참모습을 알아야 하고, 교육자는 교육자의 참모습을 알아야 하며, 학생은 학생의 참모습을 알아야 하고, 사업가는 사업가의 참모습을 알아야 하며, 노동자는 노동자의 참모습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참다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옛 성현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분수를 지키라’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한동안 유행처럼 쓰였던 ‘주제파악을 하라’는 말도 모두가 참다운 스스로 모습을 보라는 뜻이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때 이 세상은 진실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 자기 분수를 지키는 세상,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만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남을 보는 안목도 그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달콤한 거짓말에 현혹돼 우리가 받는 고통은 상상 그 이상이라는 것을 지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참모습이란 현재의 지위나 권력과 같은 일시적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엄연한 진리를 망각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나라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시절이 더럽고 추한 것이 가득 차있고 도덕도 양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약육강식의 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꿰뚫는 지혜의 안목을 잃지 않는 슬기로움으로 세상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