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칼럼] 반갑지 않은 손님, 까치

김정섭(환경예술가)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날만 되면 흔히 듣는 우리 동요 가락이다. 매년 들어도 정겹기만 하다. 이제 설날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구제역발생으로 인해 크고 작은 지방축제는 취소되고, 이제 충남 최대 축산지인 홍성군마저 구제역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현지의 각종 역사·문화시설도 휴관했다고 한다. 설날만큼은 ‘민족의 대이동’으로 표현될 만큼 우리 민족에겐 의미가 깊은 날이라지만, 고향을 찾아 내려가는 이들에게 고향을 사랑하고 축산농가의 고통과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이동을 자제하도록 요청하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인재인 듯, 천재인 듯 구제역 비상사태를 당하고 보니, 새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어디에까지 그 피해를 입혔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새해 연하장이나 달력의 맨 첫 장을 보면 자주 나타나는 새, 까치. 까치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져 왔다. 까치 소리를 듣고 잘생긴 사내아이를 얻게 됐다는 삼국유사의 석탈해 신화에서나 일년에 단 한번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착한 동물도 바로 이 까치이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은, 자신의 영역보존 대한 까치의 습성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까치는 인가와 가까이에서 가장 높은 나무에 자신의 둥지를 트는 텃새이다. 영역에 대한 텃세가 심한 새라, 자신이 사는 곳에 낯선 사람이나 동물이 접근해 오면 크게 울거나 쫓아내는 강한 의지가 있다. 심지어 황조롱이 같은 맹금류조차도 가차없이 쫓아내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까치의 특성과 행동이 우리 민족에겐 도리어 강함과 친근함을 동시에 보여주며,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을 낳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까치는 더 이상 반가운 손님을 맞이할 수 없다. 까치가 농작물과 과수를 해치고 전봇대에 둥지를 틀어 정전사고를 일으키는 등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 해 유해 동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해 야생동물로 포획된 동물 중 까치가 전체의 70퍼센트 이상으로 가장 많았다는 서울시의 통계가 있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또한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됐다. 배설물이 문화재나 건축물을 부식시키고, 생활환경에 피해를 주기도 하는 집비둘기도 이젠 더 이상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어렵게 됐다는 결정이리라.

그러나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유해한 쪽은 도리어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 까치가 나무가 아닌 전봇대에 집을 짓는 이유도, 인간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까치가 더 이상 높은 나무를 찾을 수 없으니 전봇대에다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농작물을 해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까치가 사는 곳에서는 더 이상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먹이가 없기 때문이다.

비둘기도 분명히 처음에는 사육목적을 가지고 인간이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이 더 이상 돌보지 않아, 자생하며 도시에서 살게 된 비둘기들은 도시의 인간들에게는 더는 평화의 상징도 무엇도 아닌 지저분하기만 한 ‘유해 동물’일 뿐이다. 거대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더 이상 동물들은 쉴 곳이 없다. 인간에게 피해가 간다면 얼마든지 포획이 가능하다

누군들 예상했을까? 하천의 폭군이라며 토종어의 씨를 말리는 배스도 1973년에 미국에서 처음 국립수산 진흥원 연구소로 들어온 이후, 양식의 목적으로 팔당호와 인근 조종천에 방류한 것이 시작이었다는 것을. 배스가 전국으로 확산하기까지는 불과 2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젠 전국 어디 사는 누구든 한 시간 거리엔 배스가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바라보게 된다. 인간에게 유리하면 이로운 동물이고, 인간을 귀찮게 만들면 유해한 동물일 뿐이다.

인간은 짧지 않은 세월동안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산을 개간하고 강을 막으면서 주거지를 넓혀 나갔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인정(人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강산의 변화가 사람도 못 알아볼 만큼 빠르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고 있던 주인들은 어디에 가야 했던 것일까?

인간의 기준으로는 산, 들, 바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무인(無人)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빈 곳이 아니었고 그곳의 주인들은 더는 갈 곳이 없다. 그러니 인간의 거주지 가까이에 있을 수밖에 없고, 생존을 위한 동물들의 행동이 인간에게는 피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인간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 동물들의 살 곳을 빼앗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키우다가 버려놓고는 해롭다고 정해놓으니 이러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개체수 조절을 위해 포획은 어쩔 수 없다지만, 해롭다는 오명(汚名)은 슬프게 들리기만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을 포함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생태계 유지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공생하고 공존하는 환경이 유지돼야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도 함께 유지될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정겨운 까치 노래를 들을 수 없을까 봐 슬퍼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