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민주화 혁명으로 모링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한 가운데 튀니지는 사우디에 그의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민주화 혁명에 버티다 못해 하야하고 홍해 휴양지로 떠났으나 망명을 완강히 거절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랍권에 불어닥친 민주화 혁명의 열기는 42년간 철권통치를 이어온 가다피 리비아 대통령도 망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그의 둘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은 “사태가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최후의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겠다”고 외치고 있어 비상사태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이어서 이란 바레인 예맨 알제리 등 아랍권에서 유혈혁명이 불을 뿜고 있어 독재정권의 붕괴와 장기집권의 아랍통치자들의 망명사태도 줄을 이을 전망이라는 관측이다.

이미 우리는 반세기 전 4.19 시민혁명을 일으켰고 12년의 장기집권자인 이승만을 망명의 길로 떠나보냈다. 4월 26일 아침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학생대표 5명을 경무대로 데리고 갔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나도 젊었을 때 독립협회 운동으로 왕정에 항거하고 시위를 했어. 학생들의 패기는 참 훌륭해! 자유당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했다지? 그래 부정선거 다시 하자. 나도 자유당 총재 자리 내 놓겠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라는 겁니다.” 이에 이승만은 “무엇이나를 물러나라는 혁명이었느냐. 나에게 그런 솔직한 말을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내놓아야 민주주의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의 길에 오른 것이다. 4·19 혁명의 주역인 학생들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한 계엄군이나 이승만 대통령은 모두 훌륭했다는 평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와이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그분은 독립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고 12년의 장기집권의 노욕으로 시민들의 항거에 부딪혔고 그곳에서 고이 잠들었으나 국민의 염원으로 국립묘지에 환국, 수많은 추모객의 묵도 속에서 우리의 장래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정치사는 과격한 시민혁명에 이어서 온건한 민주정부가 들어선다. 민주라는 비단 질서는 못된 시민에 의해 끊어지게 마련이고 질서의 파괴는 나라의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기에 쇠사슬의 질서가 들어서니 이것이 5·16인 것이다.

박정희를 지도자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을 맡아 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는 거액의 정지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소위 증권 조작, 일본자동차 수입, 워커힐 호텔 건설, 빠징코 도입을 했다는 비난 속에서 구정치인들은 공화당해체와 선거 보이콧을 주장했고, 반 김종필 군부계열은 쿠데타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김종필은 일제의 공직에서 사퇴 되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남긴 말은 “자의 반, 타의 반” 외유였다.

그가 다시 돌아와 공화당의장으로 국가건설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한일회담을 통해 끌어들였으나 제2이완용의 낙인과 함께 그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이어지는 반정부시위로 두 번째 망명의 길로 들어선다. 박정희의 집권욕은 1972년 10월 17일 유신 정치체제를 단행한다.

이때 김대중은 신병치료차 일본 도쿄에 묵고 있었다. 그의 귀국길은 차단됐다. 그리고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독재체제를 비난했다. 많은 해외 교포들이 그를 지지 후원했다. 또 교포들은 그에게 망명정권을 수립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민주화 투쟁으로 교포들에게 강연하며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1973년 8월 8일 일본의 한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그는 포댓자루에 손발이 묶인 채 처박혀졌고 배에 실려 바다에 던져지게 된 순간 김대중은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미국의 비행기가 추적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배에서 내려 눈을 가린 채 자동차로 집 앞까지 왔다. 13일 밤 10시 20분이었다. 눈에 감긴 붕대를 풀고 집앞 골목길에서 소변부터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일본으로 건너가 김대중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한참 뒤 김종필은 김영삼 정부의 민자당 대표로서 국회대표연설을 통해 김대중 용공음해 논을 사과했고 그뒤 김대중과 협조 체제를 갖춰 이른바 DJP 연합정부를 구성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국무총리를 맡아 보수와 진보의 벽을 깨고 제3의 정치로서 그리고 평화통일과 의원내각제 정부를 구상하며 같은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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