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너무나 다양한 시대, 너무나 바쁜 시대, 너무나 많은 것을 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러기에 잘 준비된 일꾼, 좋은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일을 잘 감당해 낼 사람들이 없다는 말들을 자주 한다. 그 일을 잘 감당할 일꾼들을 찾기 위해 온 사방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일꾼이 없는 것일까? 왜 모자랄까? 사람이 없어서일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

좋은 일꾼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꾼이 없는 것이 아니고 키우려고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냥 일꾼만을 찾는 급한 성질의 우리네 모습을 볼 수 있다. 좋은 일을 잘 감당할 일꾼을 키우는 아름다움의 소양이 있었으면 좋겠다. 때때로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는 제목으로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사정없이 흠집을 내서 쓰임 받기도 전에 상처받아 냉동이 쳐지는 아쉬운 제목들을 보면 마음이 더욱 아프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새봄을 맞으면서 보다 좋은 일꾼, 아름다운 일꾼, 멋진 일꾼을 키워 열매를 맺게 하는 우리가 됐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기준을 늘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경향이 있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고 내가 아니면 아닌 것이다. 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인가 말이다. 조물주께서는 이 땅에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드시고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는 그 다양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을 포용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일꾼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좋은 일꾼이 되도록 사랑의 발판이 돼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일꾼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사랑의 발판이 돼 줌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아무도 사랑의 발판이 돼 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자 하면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해 파멸시키려고 혈안이 돼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경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온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이다. 한 형제임에도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해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는 가슴 아픈 사건이 있다. 가인보다 나은 아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가인이 돼서는 좋은 일꾼을 키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가인이 자리 잡고 있고 내 표정 속에 가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고 내 말 속에 가인의 말이 자리 잡고 있어 귀중한 일꾼을 죽이는 우리네 모습을 보게 된다. 이래서 우리는 준비된 일꾼을 키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를 보라 저들은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야말로 사랑의 발판이 돼주셨다. 존귀한 일꾼들을 키우시기 위해 사랑의 디딤돌이 돼 주시고 품어 주셨다. 우리도 예수처럼 사랑의 디딤돌 발판이 돼 좋은 일꾼을 키우자는 것이다.
 
또한, 좋은 일꾼은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많이 인내하며 기다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 어릴 적에 뒤뜰에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동생들과 그 나무에서 단감을 따 먹으려고 몇 년을 기다렸던 아련한 추억이 있다. 그 시간이 많이도 길었던 것 같다. 하물며 좋은 일꾼, 잘 준비된 능력 있는 일꾼을 키운다는 것은 더 많은 인내의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랑의 기다림, 용서의 기다림, 이해의 기다림, 배려의 기다림, 이것이 해답일 것이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젊은 일꾼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봄에 우리는 좋은 일꾼을 만들고 키우는 의식 있는 조경수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희망해 본다. 나 또한 사람 키우는 조경수로 멋지게 살아가고 싶다. 이 수원지역이 이 나라가 이 세계가 진정 필요한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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