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끝! 소가 돌아왔다

[재입식 현장]가평군 신하리 축산농민 김보영 씨38마리 예방적 살처분…한우 13마리 새로 들여와

누런 빛깔이 듬직해 보인다. 한우 13마리. 깨끗한 톱밥이 깔린 축사를 노닌다. 모두 생후 8~9개월 된 암컷들이다. 낯선 사람을 보자 우르르 모인다. 양 떼가 따로 없다. 눈망울에 질곡의 때가 전혀 배어 있지 않다. 순박하다. 한편으론 안쓰럽다.

불과 석 달 전 이 축사 안이 보금자리였던 소들이 있었다. 그들이 겪은 생지옥을 이 녀석들은 알까. 마침 축사 옆에 땅 밖으로 솟아나온 파이프들이 보인다. 매몰된 사체에서 나오는 가스를 배출하는 유공관이다. 달리 말하자면 무덤을 알리는 조기(弔旗)다.

주검에 대한 기억은 오래갈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하지 않던가. 소 13마리를 새 ‘자식’으로 들인 김보영(남•55) 씨가 오랜만에 미소를 짓는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이놈들과 나이 먹어서까지 계속 살아가야지요…”

볏짚을 먹이며 소를 바라보는 김씨의 눈에 애정이 가득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먹을 때는 얌전하다가도 김씨가 이마라도 쓰다듬을라치면 녀석들은 달아나기 일쑤다. “들여온 지 하루 이틀밖에 안 돼 소들이 낯을 가려서요. 며칠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김씨가 웃는다.

지난해 소 38마리 예방적 살처분 당해

25일 가평군 하면 신하리에 있는 신우주목장. 한동안 텅 비어 있던 430㎡(130평) 축사에 활기가 넘친다. 농장주 김씨는 “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축사에 가 사료랑 볏짚을 줬어요. 그전엔 적적했죠.”

그전이라고 해봐야 불과 3개월 전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김씨는 젖소 33마리, 한우 5마리를 키웠다. 전 재산이었던 소 38마리를 김씨는 순식간에 잃었다.

지난해 12월 21일 가평군에선 유일하게 신하리에 있는 축산농가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발생 농가에서 반경 500m밖이어서 자신의 농장은 괜찮을 줄 알았다고 김씨는 말했다.

문제는 수의사였다. 역학조사결과 발생 농가를 들른 수의사가 여기저기 다른 농장들을 방문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의 농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하리에 있는 젖소농가 6곳 중 5곳의 소들이 이런 연유로 예방적 살처분 대상이 됐다. 김씨의 소 38마리를 포함해 젖소 200여 마리가 매몰됐다. 한우농가까지 포함하면 총 20여 농가에서 500여 마리가 땅에 묻혔다.

김씨가 살처분 통보를 받은 건 22일이었다. 이틀이 지난 24일 오후 3시 김씨의 소들은 구덩이로 몰렸다. 두 시간여 만에 땅 속에 묻혔다. 키운 지 6년 된 소도 있었다. 상심이 컸다. 축산업을 포기할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당시를 떠올리며 김씨가 갑자기 지갑에서 아기 사진을 꺼냈다. 신하리에서 첫 번째 살처분이 있던 지난 12월 21일 태어난 손녀였다. 물론, 그날 김씨는 손녀를 보러 가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소들이 살처분된 날이니 말해 무엇 하랴.

그 손녀가 30일이면 백일을 맞는다. 새 소들도 들여왔다.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구제역이 몰고 온 끔찍한 겨울이 가니 봄을 타고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다.

“나머지 정부보상금 빨리 지급됐으면”

살처분 후에도 김씨의 기상 시간은 변함없었다. 새벽 5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소를 돌보던 버릇 때문이었다. 착잡했다. 달라진 건 키우던 소가 사라진 것뿐인데 할 일이 없었다. “그냥 놀았다”고 김씨는 말한다.

소를 매몰한 지 6일이 지나 정부보상금이 나왔다. 1마리당 250만원씩 책정됐다. 그마저 40%만 나왔다. 그 돈으로 김씨는 3개월을 보냈다. 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상•하수도 녹이는 일을 부업으로 했다. 그렇게 20일을 일한 게 벌이의 전부였다.

막막하던 김씨에게 희소식이 들린 건 이달 들어서다. 가평군에서 이동제한조치가 15일부터 풀렸다. 그러면서 재입식 절차가 진행됐다.

살처분 농가들은 재입식을 군청에 신청했다. 농장을 청소하고 소독했다. 인근 군 장병도 동원됐다. 군청 가축방역관이 나와서 농장의 위생 상태를 1차로 점검했다. 살처분 농장주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시행됐다.

경기도축산위생연구소가 2차 점검을 한 후에야 비로소 가평군에서 첫 번째 재입식이 허용됐다. 그게 지난 19일이다. 이날 3농가가 소를 새로 들였고, 23일 두 번째 입식이 허용돼 6농가가 소를 사왔다. 25일 현재 가평군에서 한우 31마리, 젖소 170마리가 재입식됐다.

김보영 씨의 경우 23일 10마리, 24일 3마리를 들여왔다. 소들은 가평군내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지역에서 사왔다. 한우 1마리당 230여만원을 줬다. 사실 젖소를 키워온 김씨로선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초임 만삭인 젖소 1마리가 400만원이 넘다 보니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료도 농협에서 외상으로 샀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고 김씨는 털어놨다.

“나머지 정부보상금이 빨리 나와야지 방법이 없어요. 매몰하라고 할 땐 언제고, 정부가 왜 빨리 집행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당장 사료 값이라도 벌려고 김씨는 며칠 뒤 인근 골프장에 잡역부로 나간다. 잔디를 심거나 풀을 베는 일이다. 하루 일당은 5만원. 다 소를 키우기 위해서다.

“22년째 소를 키웠어요. 내 나이 쉰다섯인데 막노동을 할 수도 없고, 써주지도 않아요. 집에서 손자나 보라고 그러지.”

잇따라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새로 들인 소를 바라보는 김씨의 눈에 애틋함이 어려 있다. “아무튼, 축사가 텅 비어 있을 때보단 낫죠. 저놈들하고 같이 여생 보내는 거죠. 보상비가 나오면 소를 더 들여올 생각이에요. 젖소를 사 우유도 짜고 그래야죠.”

가평군을 비롯해 도내 전역에서 구제역 광풍이 멎었다. 축산농민이 입은 상처에 새살도 돋아나고 있다. 곪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그들의 소망은 간단하다. 예전처럼 소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한 개그 프로에선 “소는 누가 키우느냐”며 키울 사람이 없다고 성화지만, 현실은 또 다르다.

원했던 원치 않았던 소가 유일한 재산인 사람들이 경기도에 많다. 그들이 재산을 불릴 기회를 주는 게 도리 아닐까. 그들의 재기를 과연 누가 도와야 할까.

[현재 구제역은?]

정부는 24일 구제역 가축질병 위기 경보를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했다. 구제역이 진정됐음을 공표한 것이다.

도는 구제역이 발생했던 도내 19개 시•군의 이동제한조치를 모두 해제한 상태다. 재입식을 위한 절차도 진행하고 있다. 24일 현재 10개 시•군 축산농가를 대상으로 재입식 전(前) 교육을 했고, 11개 시•군 2천여 농가에선 클린 대청소도 했다. 나머지 시•군 농가들을 대상으로도 이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지난해 11월 말 발생한 구제역으로 전국에서 살처분 된 소 15만1천마리의 44%인 6만7천835마리가 도내에서 처리됐다. 돼지는 전국 331만7천마리의 절반인 166만4천669마리가 매몰됐다. 가평군의 경우 38농가에서 키우던 소 1천718마리가 살처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