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물고을’ 수원, 한반도의 배꼽을 꿈꾸다

송영완 수원박물관장

우리가 살고 있는 ‘수원(水原)’이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1271년 고려 원종 12년의 일이다. ‘양광주도’에 소속된 ‘수주(水州)’가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면서 ‘수원’이라는 명칭이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이 해 착량(窄梁)에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몽고 군사들이 대부도에 쳐들어와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자 대부도(大阜島)의 백성들이 하나가 돼 몽고 군사를 물리치고 항쟁을 했다.

중앙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대부도 민들의 반란이었다. 그래서 이때 수주부사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부도 주민들의 폭동을 진압해 그 공로로 ‘수주’가 ‘수원도호부’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수원’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까지는 ‘모수(牟水)’ 혹은 ‘매홀(買忽)’로 불리었는데, 모(牟)나 뫼(買)는 발음상 물(水)과 관련된 것으로 ‘모수’혹은‘매홀’로 기록된 고유 지명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한자어 지명으로 바뀌면서 경덕왕 16년(757)에 지명의 뜻을 살린‘수성(水城)’으로 개칭됐다가 이후 수성에서 비롯된 ‘수주’, ‘수원’ 등의 명칭이 나타나게 됐다.

수원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지 올해로 740년이 됐다. 이 시점에 수원·화성·오산의 광역화 도시로의 통합 논의도 뜨거워지고 있다.

수원·화성·오산의 통합화 논의는 단순히 행정구역의 통합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 도시들이 관통하고 있는 역사적인 옛 수원지역의 모습은 행정구역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적 전통과 정체성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원은 수원천이 서해를 만나기까지 넓은 영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경기만을 통과하는 군사적 중심지이자 경기남부지역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이번 수원박물관이 주관하는 ‘수원 명칭 740주년 기념 학술대회, - 물고을 수원, 한반도의 배꼽을 꿈꾸다 -’는 수원이라는 명칭을 통해 수원의 역사적 전통과 수원 지역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서 광역화를 향한 기반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자 기획됐다.

역사적으로 수원은 한반도의 중심부인 경기도의 수부도시로서 기능해오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끌어 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이 오늘에도 계승돼야 하며, 현 수원·화성·오산 통합의 광역화 논의는 바다를 품고 있었던 원래의 옛 수원의 모습을 찾기 위한 꿈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앞으로 서해로 가는 진정한 물고을 ‘수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으로 한반도의 배꼽을 꿈꾸는 수원과 수원지역 사람들이 한울타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