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작은 손길 큰 사랑

김영자 수원보훈지청 보훈도우미
고등학생 자식들 뒷바라지와 집안일, 그리고 성당 봉사활동도 병행하며 바쁘게 살다가 자식들이 성인이 돼 한가로이 집안일 위주로 생활하다 보니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됐다. 나는 과연 다른 이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이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던져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알아보던 차에 ‘보훈도우미’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보훈도우미’는 젊은 날에 나라를 위해 싸우고 희생한 분들이 이제는 노쇠할 때 그분들을 도와주고 돌보는 일을 하는 직업이기에, 내가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정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곧바로 자격증 시험에 도전, 이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성당에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했던 경험을 살려 봉사하는 마음으로 어르신들을 대하자’라는 생각으로 요양보호사로 1년간 활동하던 중 수원보훈지청에 입사했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국가유공자이신 어르신들을 만나 뵀고, 언제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그분들을 도와드린다기보다는 그분들의 희생에 보답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바로 장기환 어르신이다. 이분은 6·25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에 공헌하신 분이기에 이분을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54세 때부터 혼자가 돼 올해 여든 살이 되신 분이신데, 외로움을 굉장히 많이 타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분이다. 도우미 선생님들이 몇 번 바뀌면서 적응하기 어려워하시고 쉽게 정도 못 주시던 중 나를 만나게 됐다.

처음에는 오는 것조차 반가워하지 않으셨다. 아마 나도 곧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마음을 주면 또 이별할 때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하신 걸까. 좀처럼 곁을 내주시지 않으셨다.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으시려 하고, 귀찮고 불편해하셨다. 나도 평소에 첫인상이 차가워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듣기에, 어르신이 불편해하시는 것이 내 인상이 좋지 않아서일까 더욱 신경이 쓰였다.

내 마음은 절대 차갑지 않고 따뜻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일보다는 우선 어르신과 가까워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마시는 시간을 자주 갖고, 산책도 하며 어르신과 눈을 맞추고 어르신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르고 나니 어르신께서도 차츰차츰 마음의 문을 열게 됐고, 말씀도 많이 해 주시고 웃어주시기도 하신다.

고맙다는 표현도 많이 해주셔서 정말 일하는 보람을 많이 느끼고 있다. 달걀프라이 몇 개에도 그렇게 고마워 해주시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요즘엔 된장국을 좋아하셔서 양배추 넣고 양파 넣고 된장국을 한 솥 끓이고 온다. 어르신께서는 자식도 이렇게 안 해주는데 누가 이렇게 해주겠느냐 하시면서 자식보다 훨씬 낫다고 고마워하신다.

사실 어르신께는 슬하에 2남 2녀의 자녀가 있지만, 빌라에서 홀로 생활하고 계시고 자녀분들도 1년에 한두 번 찾아올 뿐, 나머지 시간은 철저하게 홀로 살아가고 계신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워 더 많이 찾아뵙고 말동무도 해 드리고 도움도 드리고 싶다.

어르신께 많이 못 해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무슨 말이냐며 이렇게 와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하신다. 요거트 하나라도 꼭 챙겨주시면서 먹고 가라 하시고, 떡을 쪄서 가져가라고 하시면서 배고프면 안 된다고 마음깊이 생각해주신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눈앞이 뿌예지면서 가슴이 찡해지곤 한다. 그리고 내가 그 누군가에게 이렇게 도움되고 의지 되는 사람이라는 것에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난 사람 사는 냄새와 정을 느낄 수 있는 보훈 도우미라는 제 직업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앞으로도 이 자부심을 마음깊이 새기고 초심을 잃지 않으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