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2년 선생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副尉(오늘날 중위)로 근무하다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사실상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북로군정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을 지지하는 무장단체였다. 한편 선생은 1920년 3월 왕청현 십리평에 건립된 군사간부양성학교인 사관양성소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군사인재 양성하였다. 같은해 9월 배출된 졸업생 대다수는 교성대로 편성되어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선생 또한 북로군성서 대대장으로서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데 앞장섰다.
이후 선생은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의 총사령에 추대되어 군대의 지휘를 책임지게 되었다. 1921년 3월 대부분의 독립군이 이만을 거쳐 자유시(알렉쎄호스크)로 이동하였고 노령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통합하여 1,400여 명의 병력을 가진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선생은 여기에서 홍범도, 이청천 등과 함께 참모부원으로 선발되어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대한의용군의 활동은 물거품이 되자, 1922년 선생은 목릉현 마교하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지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고, 영안현 영고탑으로 이동하여 이주한인을 상대로 의무금 징수활동 등을 벌이며 재기를 모색하였다. 이후 동만주 지역으로 거점을 옮긴 선생은 고려혁명군의 총사령, 대한군정서 총사령으로 선출되어 군대의 지휘 책임을 맡았다. 1912년 망명 이후 선생의 삶은 곧 만주지역 무장투쟁 역사가 되었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은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선생은 연수현 태평촌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신민부 민정파의 정당조직인 고려국민당의 군사부위원이 되어 한인의 자치를 통해 독립운동 역량을 확보해 나갔다.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 결성 및 삼부를 통합하기 위한 활동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 중앙위원회가 북만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 지도부를 완성하였는데, 이때 4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1931년 3월경 한족자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주하현 하동농장에 갔다. 지청천, 신숙 등과 만나 장래운동을 협의하던 중 당시 백운봉, 최호 등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선생의 나이 52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