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와 헤어진 뒤 백동수는 박지원을 이끌고 개성에서 멀지 않은 금천군 연암으로 향했다.

산은 깊고 계곡은 길어서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적막한 곳이었다.

그러나 몇 굼이 고개를 지나자 갑자기 탁 트인 분지가 나타났다.

   
▲ 조선의 협객 백동수는 조선 정조대왕 때의 장용영 무사들의 24반무예를 널리 전파하고 있는 김영호씨가 지은 역사소설이다.
백동수는 갈대 무성한 냇가에 말을 세우고 평계(平溪) 냇물로 목을 축인 뒤 느긋한 표정으로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천마산 자락에 자리잡은 연암은 개성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었으나 행정구역상으로는 금천군에 속했다. 한때 고려의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인 목은 이색과 대시인으로 추앙 받았던 익재 이제현이 살았던 곳이다.

연암에서 10리 떨어진 곳에는 이제현을 모시는 서원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찾았을 때는 화전민들만 약초를 캐고 숯를 구우며 살고 있었다.

백동수는 손에 든 채찍으로 높은 언덕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중, 저기 저곳을 보시게. 저곳에 뽕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면 좋겠군. 갈대를 불사르고 밭을 일구면 한 해에 좁쌀 1,000석은 거둘 수 있을 것이야”

박지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동수가 농사에 전문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계절은 늦봄이었지만 갈대 잎은 메말라 있었다.

갈대에 가려 들판이 제대로 보이지 않자 백동수는 부싯돌을 꺼내 불을 놓았다.

마른 갈대 잎은 순식간에 타 들어가 바람을 따라 불길이 무섭게 솟아올랐다.

갈대밭에 숨어 있던 꿩이 느닷없는 불길에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순간 노루 새끼 한 마리가 갈대밭에서 튀어나오더니 내달리기 시작했다.

백동수는 팔을 걷어붙이고 번개처럼 노루를 뒤쫓았고, 박지원도 뒤를 따랐다.

노루는 곧 잡힐 듯하더니 냇물로 뛰어들어 산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큰 키에 육중한 몸으로 열심히 뒤따라온 박지원이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백동수의 곁에 섰다.

“백 년도 못 되는 인생살이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답답하게 일생을 나무와 바위에 파묻혀 조밥이나 먹고, 꿩, 토끼나 사냥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는가?”

백동수의 말에 박지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암은 제비바위, 곧 평계 주위에 있는 바위 절벽에 제비 둥지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암골은 농사지을 만한 들판과 물이 풍부하고 경치 또한 매우 수려한 곳이었다.

박지원은 이곳이 마음에 꼭 들었다.

충청도 단양에 들어갈 계획은 아예 잊어버렸다.

박지원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호를 ‘연암거사’라 정했다.

좋은 터를 잡아준 백동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연암골을 품고 있는 금천은 신라의 무오대사와 관련이 깊은 고장이다.

병법에 정통했던 무오대사는 신라 원성와 2년(786)에 <병법>열다섯 권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병서로 알려져 있는<무오병법>이다.

책을 받아 본 왕은 대사에게 굴압(금천군의 옛이름)현령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