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인문학과 함께 극복하자

인간과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생활 곳곳에 과학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곳 없이 우리는 지금 과학기술의 ‘ 홍수 ’ 속에 살고 있다.

때로는 너무도 많아 우리가 기술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젠 진부한 문제제기가 되어 버렸겠지만 과연 그것은 진실인가. 과학기술에 가려져 인간의 고유한 정서적, 심미적 기능을 잃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 즉, 환경오염에서 시작하여 전쟁까지 , 우리는 문제의 ‘ 홍수 ’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과학 기술만으로는 채울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 주변의 많은 문제들은, 그 근원이 ‘ 엔트로피 시스템 ’에서 나온 결과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엔트로피란 물질이 열역학적 변화를 일으킬 때 변화된 온도로 열량을 나눈 값이다. 즉, 무질서의 정도를 측정하는 단위 , 쓸 수 없게 된 에너지를 뜻하는 것이며 극대점을 향해 가는 성질을 띄고 있다.

세계적인 문명 비평가로 이름난 이 책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말한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엔트로피 시스템에 둘러 싸여 있고, 그것은 모든 분야에 걸쳐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며 이러한 시스템은 자원의 고갈, 데카르트와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기계적인 세계관이 만들어낸 ‘ 진보 ’ 가 아닌 무조건적 ‘ 개발 ’에서 나왔다고 말이다.

덧붙여 그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꾀하여 저 엔트로피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우리는 문명적으로 대단한 진보를 해왔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몇몇 철학자들의 오판으로부터 나온 기계론적 세계관 속에서 퇴보를 거듭하며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무분별한 과학 ‘ 기술 ’ 의 발전만을 추구하며 물질적인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연을 훼손해왔으며 , 물질의 고갈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했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다량생산을 최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며 사회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엔트로피 ‘ 분수령 ’ 에 다다르고 있는 상태이다.

엔트로피 시스템이 극대점에 달하고 있다는 것, 쓸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회 구조는 위험수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엔트로피 시스템은 자원의 고갈이나 생활방식의 한계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변화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즉, 편리함만을 추구하여 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것과 보다 집중적으로 자연을 착취하는 방법에 발전을 가한 것-인간의 무지와 인식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올바르게 ‘ 진보 ’ 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 진보 ’ 라는 개념으로 교육받아왔던 역사라는 것은 그 옛날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과 같이 점점 무질서해지고 혼란의 상태로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엔트로피 시스템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첫 번째로 환경오염에 대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엔트로피 시스템의 결과물은 단지 환경오염에 그치지 않는다.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엔트로피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환경에서부터 교육, 군사, 보건에 이르기까지의 피해를 고스란히 돌려받는 자학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자연과학을 이용해 우리들 자신 즉, 인간을 위해 발전된 사회를 만들겠다고 외쳤지만 엔트로피 시스템 생성을 부추기면서 커다란 공황과도 같은 상태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엔트로피 시스템은 일종의 패러독스가 되었다.

제레미 리프킨은 저 엔트로피 시스템 구축에 대한 방안으로 부의 재분배, 국제 사회의 균형적 발전-예컨대, 제국주의적 국가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제3세계 나라들의 특성에 들어맞는 경제 발전 방안 구축과 같은 것-, 태양에너지 시대의 새로운 인프라, 과학과 종교 그리고 교육이 개혁 등을 내놓았다.

우리는 실로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고, 이 시대를 구성하는 것은 무형의 생산물인 정보이며 중요한 것은 이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 교육 ’을 실시하는 것이다.

저 엔트로피 시스템의 구축에 교육은 반드시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란 것이다.

우리는 학문의 조화 위에서 과학적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조화, 이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저 엔트로피 시스템을 사회 곳곳에 적용시키는 것은, 자연 과학이라는 소중한 학문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 진보의 역사 ’를 만드는 것과 같다.

무분별한 기계적 발달에서 나오는 쓸모없는 에너지를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인문학을 모르는 과학자는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인문학의 토대 이에서 과학이 발전해 나가는 조화를 이루어야만 우리는 인간과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구조인 저 엔트로피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오랫동안 공공연히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했던 것은 윤리, 철학, 역사 등의 인문학으로부터 나온 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씩 이를 망각해오고 있지 않았던가.

불확정성 원리로 물리학계의 일인자가 된 독일의 저명한 핵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저서인 부분과 전체에서 자신이 핵물리학을 연구하게 된 것에 대하여 철학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는 핵물리학에 관한 실험을 하기 전에 스스로 ‘ 나는 왜 핵물리학을 선택하였는가, 무엇 때문인가 ’ 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고 자신의 자연 과학 연구에 대한 철학을 세웠다. 비록 그는 나중에 나치 정권에 의해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말지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주인공 ‘ 빅터 프랑켄슈타인 ’ 이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인간상을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괴로워하다 생을 마감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망각하고, 과학의 힘을 빌어 기술이라는 것만으로 인간을 장조하려는 무모한 도전을 하였기 때문이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MIT공대생들은 일년에 총 21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그중 무려 12학점이 역사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과목에서 충당하도록 정해져 있다.

‘ 우리는 기술자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과학자를 만드는 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다 ’ 는 것이다. 이렇듯 인문학과 과학에 있어 서로의 결핍은 있을 수 없다.

물론 과학을 모르는 인문학자 역시 언변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인문학을 모르는 과학자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과학이란 것이 우리의 생활과 엔트로피 시스템 구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저 엔트로피 시스템을 이룩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은 기계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 과학적 유토피아 ’를 그렸다.

하지만 지금 그의 사상은 반짝했던 산업혁명 시대에만 유용할 수 있었을지 모를 그런 것이 되었다. 그가 생각했던 사상은 현재 엔트로피 시스템의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는 인문학을 토대로 하여 저 엔트로피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진정한 과학,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인간을 소중히 하는 ‘ 숨쉬는 과학 ’ 에 대한 교육을 활성화 시켜 현대 사회에 걸맞는 ‘ 과학적 유토피아 ’즉, 저 엔트로피 시스템 사회를 이루는 데 힘써야 한다.

과학기술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게 되었고, 지금 사회를 점점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는 엔트로피 시스템을 없애려면 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스스로 가지게끔하여 사회 구조 전반에 대한 변화를 꾀하여야 한다.

다시는 엔트로피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반복해서 생산해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 인간 자신의 삶과 행복을 지키기 위한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진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