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벗, 박지원.이덕무와의 전국 유람 3

[조선의 협객 백동수 33] 우리 땅 곳곳에 닿은 발길

두사람은 말고삐를 북쪽으로 돌려 평양으로 향했다. 평산, 서흥, 봉산을 지나 사리원, 황주, 중화를 거쳐 평양에 다다랐다. 서울에서 560리 떨어진 평양은 서울 다음으로 큰 군사와 문화의 도시였다.

백동수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4월 초파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날 저녁 이덕무와 이광섭을 만나 대동강변에서 벌어진 관등절 행사를 구경하며 회포를 풀었다.

   
▲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약산의 철옹성.
멀리서 보면 마치 쇠항아리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튿날은 평양성을 둘러보았다. 평양성은 임진왜란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평양지>에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하는 광경이 실려 있다.

[계사년(1593) 1월 8일 새벽, 제독 이여송이 징을 울리자 3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1군은 칠성문, 1군은 보통문, 1군은 함구문을 맞아 공격하였다. 왜군은 장창과 대검을 사용해 칼끝을 나란히 하여 내려뜨리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 같고 화살과 탄환이 비오듯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독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군사 한 명을 베어 진 앞에 돌려 보이니 참장 낙상지가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갔고 모든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낙상지가 겨드랑이에 대포를 끼고서 크게 외치며 연달아 쏘니 연기가 하늘로 뻗쳤다. 또 한 손으로 죽은 시체를 성위로 던져 올리자 왜군이 "군사가 날아왔다."며 기겁을 하고 물러났다.]

낙상지는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계급이 참장이라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가 지휘한 5,000명의 절강부대는 뛰어난 전투력과 엄격한 규율을 갖추고 있었다. 나머지 대다수의 명군은 애궂게 민간을 약탈하는 일에만 용맹을 발휘하여 "왜놈은 얼레빗이요, 되놈은 참빗이다."는 원성을 자아낸 북방군이었다.

구원군이든 침략군이든 외국 군대가 출동하면 가장 고통 당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그뿐인가, 고관들도 명나라 장수들의 횡포와 멸시를 감수해야 했다. 백동수는 이런 이야기들을 평양성을 거닐며 박지원에게 들려주었다.

백동수는 벗들과 함께 평양에 남아 있는 정전의 유적을 둘러보고 강동현에 있는 단군 묘에 들러 참배했다.

그리고 다시 이덕무와 아쉬운 이별을 해야했다. 벗과 함께 여행하지 못함을 새삼 아쉬워하며 안주, 박천을 지나 영변 철옹성에 올랐다. 멀리서 보면 마치 쇠항아리 같다 해서 철옹성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천연요새에 세워진 고성이다.

철옹성 동장대에서 바라보는 약산의 봄 풍경은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었다. 때마침 만춘이라 약산을 뒤덮은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이고 있었다.

상춘객 틈에서 그들도 탄성을 질렀다. 철옹성은 3년 전 박제가가 영변부사였던 장인 이관상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동안 머물면서 과거공부를 했던 곳이었다.

철옹성에는 이관상이 말을 기르기 위해 세운 마별청이 있었는데, 박제가가 마별청 상량문을 지었다.

두 사람은 동장대에 서서 영변 고을을 내려보고, 동쪽에 높이 솟은 묫향산을 바라보았다.

발길을 조심하며 가파른 산길을 지나 묘향산(1,909미터)에 닿았다. 금강산이 가을이라면 묘향산은 봄이었다. 금강산은 골산이고 지리산은 육산이지만 묘향산은 이 둘을 두루 갖춘 산이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묘향산을 '조선 제일의 명산'이라 불렀다. 산에 들어서면 신비한 향내가 은은하게 풍겨 '묘향'이라 했다는 등 이야기를 간직한 골짜기마다 보현사, 안심사 등 이름 높은 고찰이 많았다.

첫날은 용문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용문사는 여행을 떠나기 전 백동수를 찾아온 박제가가 "날이 궂어 묘향산 비로봉과 향로봉에 올라 요동과 황해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럽습니다. 묘향산에 가시면 반드시 비로봉에 올라 요동과 황해를 보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던 절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밖을 보니 하늘이 더없이 맑았다. 비로봉에 오른 백동수는 섬들이 점점이 박힌 황해와 압록강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요동을 굽어보았다.

조선 선비들의 생각이 옹색한 것은 영토가 좁은 탓도 없진 않으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넓은 들을 말 타고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이날은 상원암에서 묵었다. 마침 4월 보름이라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사방을 비추어 대낮처럼 환했다.

암자앞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안개가 달빛을 머금어 수은 바다를 이루었다. 그 아래쪽에서 코 고는 소리 같은 것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상원암 승려는 '저 아래 인간 세상에는 지금 뇌성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을 것'이라 했다. 사나흘을 묘향산에서 지낸 뒤 산을 내려와 안주에서 당시 강원도로 접어들었다. 백동수는 "폭우가 쏟아져 평지에도 물이 한길이나 흐르고 민가가 떠내려갔다"는 주민들의 얘기를 듣고, 상원암 승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문득 박지원이 묘향산 비로봉 쪽을 바라보며 득도한 도인처럼 말했다.

"어젯밤에 우리는 구름비 밖에서 밝은 달을 껴안고 편안하게 지냈네 그려. 저 묘향산은 태산에 비하면 겨우 한 개 둔덕에 지나지 않을 뿐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 높낮이에 따라 세상이 이와 같이 판이하니 성인이 천하를 살펴보면 어떻겠는가!"

묘향산에는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는데 산 아래의 고을에는 큰비가 내린 것을 가리킨 듯하나, 실은 담헌 홍대용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백동수도 홍대용에게 땅이 하루에 한 바퀴 돌아 하루가 된다는 지구의 자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정확한 의미를 백동수나 박지원이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의 위대함에 비해 인간은 보 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