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의 그림이 있는 풍경⑤] 백석과 흰 당나귀

▲ 백석과 흰 당나귀 / 90.9×72.7cm / Acrylic on Canvas / 2010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인 백석이 연인 자야를 떠올리며 쓴 시로 알려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일부이다. 마가리 산골로 들어가는 굽은 길을 나타샤는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위에 인 보자기에는 그녀의 남자가 좋아하는 호박떡, 송구떡의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 어디서 언제 왔을지 알 수 없는 흰 당나귀는 그녀의 길벗이 되어 가는 길을 지켜주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길의 끝에는 젊은 백석이, 겨울바람에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수십년의 세월을 흘려보낸 후에야 가능했던 이들의 재회. 산속의 모든 것은 정지해 있고 붉은 길 위로 여인과 당나귀의 움직임만을 극대화해 긴장감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림의 구상은 1999년에 김영한 여사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으로 나오기까지 10여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다가오는 2012년은 백석시인의 탄생 100주년이다. 적어도 내년만큼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시작되는 첫 나들이는 길상사와 함께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