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베푸는 유상의 후예 조웅호 회장

[팔달문시장 기획연재] '선비상인, 유상의 뿌리를 찾아서' ⑤·끝

본 연재기획은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의 2011년 수원 팔달문시장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왕이 만든 시장’ 수원 팔달문 시장의 유래를 찾아보는 역사 기획물이다.

필자 김준혁 교수(문학박사, 수원·정조 역사연구 전문가)는 정조시대 실학자를 중심으로 대두된 '양반상인론'이 수원 팔달문시장 시장에서 꽃 피우게 된 유래를 쫓아, 직접 전남 해남 녹우당을 방문해 선비상인, 유상의 표본, 해남윤문(海南尹門)의 종손 윤형식 선생을 만났었다. 본편은 본래 4부작이였던 기획에서 1부를 추가 편성해, 현재 수원 팔달문시장에서 지난한 현대사를 거쳐 유상의 상도를 올곧이 지켜온 수원 유상의 후예, 조웅호 선생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2년 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제3대 화성유수이자 정조의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영의 대장을 역임한 무의공 조심태 장군의 표준영정을 제작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화성을 설계하였다면 화성 축성의 실질적 책임자이자 도시건설의 입안자는 조심태 화성유수였다. 그를 얼마나 신뢰하였으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이전할 때 수원부사를 시키고, 화성을 축성할 때 화성유수를 시켰겠는가! 그럼에도 이분의 영정이 세월이 오래 흐르고 일제강점기에 영정이 사라지는 바람에 표준영정을 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두상 전문가인 표준영정 심의위원이 선대들의 얼굴이 후대들에게서 나타난다고 하면서 조심태 장군의 후예인 평양 조씨들의 얼굴을 조사하기를 권하였고, 100여분의 두상을 표준으로 하여 장군의 영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후손들 중에서 조심태 장군의 표준영정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후손 중의 한분이 바로 남문패션시장운영위원장 조웅호 회장이다.

팔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아직도 팔씨름을 젊은이에게 져 본적 없는 강철 같은 체력에 밤새 술을 마셔도 쓰러지지 않는 호주가인 그는 평생을 한결같이 성실하게 살았다. 그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보전하기 위한 민간 문화재 지킴이 단체인 화성연구회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화성과 붙어있는 시장에서 삶을 시작하셨던 분이었기에 화성의 소중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화성연구회 창립에 기여하였고, 고문을 맡아 오늘날까지 연구회 활동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가 남문시장 운영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그의 부친 조재훈 선생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80년 전에 현재의 남문시장에 비단을 취급하는 광덕상회를 열었다. ‘광덕(넓을 광廣. 큰 덕德)상회’라는 이름으로 상호를 지은 것은 조재훈 선생의 장사에 대한 철학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익만 생각하고 장사를 하는 상인이 아니었다. 대대로 선비집안으로 훈장을 하셨던 그의 부친의 노여움을 사면서 상회를 열었던 것은 장사를 해서 정당한 부를 쌓아 넓게 덕을 베풀 수 있을 거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남문시장과 영동시장 그리고 팔달문 시장의 원조인 화성 성외시장을 건설한 실용정신의 소유자 화성유수 조심태 장군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현재의 팔달문시장. 이상세 화백작
일제강점기에 시절이 어지러워지고 비단거래가 줄어들면서 광덕상회는 무명, 광목, 옥양목과 문풍지를 취급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광덕상회는 폭격을 맞아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수복 후 조재훈 선생은 불탄 자리에 다시 건물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광덕상회를 열었다. 양반체통을 어긴다 하여 부친께 매를 맞으면서 시작했던 장사를 그만둘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규모 있는 장사로 부를 쌓게 되자 조재훈 선생은 종갓집 장손으로서 종중에다 20억을 내놓으셨다. 그 돈은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의 교육비에도 들어가고, 조씨 가문을 여러모로 일으키는데 쓰였다.

조웅호 선생이 어릴 때 아버님이 항상 가르치신 말이 그것이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양반이 못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양반이라도 장사를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다. 장사를 하던 뭐를 하던 양반은 양반의 정신을 지니고 있으면 그게 양반이다. 장사도 상인정신을 바로 세워서 하면 된다.”

말씀으로 그치지 않고, 조재훈 선생은 실제로 생활 속에서 상도의 예를 지키셨다. 심지어 상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낼 때도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돈도 새 돈으로 바꿔서 냈다. 정당한 이윤에 대한 세금을 내는 것 또한 상도라 여겼던 것이다. 덕분에 조재훈 선생은 경기도에서는 최초로 국세청에서 주는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양반답게 상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 아버님이 실천적인 삶으로 가르쳐 준 말씀을 조웅호 선생은 평생의 가르침으로 새겼고, 그 말씀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조웅호 선생은 1960년대 초, 가게를 물려받아 한동안 장사에 몰두했다. 그러나 광덕상회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수요가 없었고, 상권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 책임을 느낀 조웅호 선생은 71년도에 가게를 접고 대한체육회에 입사, 78년도까지 근무했다. 퇴사 후 그는 다시 남문패션1번가로 지명이 바뀐 시장으로 돌아와 건물을 새로 지어 올렸다. 아버님이 이곳에서 장사를 하셨고 터를 잡은 만큼, 그에게 이 터는 고향이기도 하고 아버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새로 지은 건물에서 조웅호 선생은 ‘수원바둑협회’를 설립해 전국적인 행사를 치르는 등 바둑문화를 확장하는 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2층 전체를 편안한 휴식처로 꾸며서 누구든지 와서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광덕상회’라는 원래의 이름을 쫓아 넓게 덕을 펼치고 싶었던 아버님의 뜻을 이어가려는 아들의 뜻에서였다. 실로 조웅호 선생이 내놓은 2층 너른 공간은 바둑애호가를 비롯해 한담을 나누거나 사랑방이 필요한 상인들에게는 요긴한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34년째 ‘수원시 소년소녀가장 후원회’ 회장으로, 수원 장애인단체인 ‘한마음회’ 회장으로 소리 소문 없이 도움을 주고 있는 그의 삶은 참으로 ‘廣德상회’의 아들답다. 더불어 정조 시대 유상(柳商)의 후예인 것이다.
 

▲ 김준혁 박사
글=김준혁(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문학박사)
취재=안지숙 작가
기획=(주)브랜드스토리, 팔달문상인회, 수원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