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기념관, 유물수집이 먼저다

[김훈동칼럼]

수원예총 회장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한 도시의 얼굴이자 예술과 문화수준의 상징이다.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架橋)를 놓는 일이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 사실들을 그대로 남겨놓는 유물이 시간을 담아냄으로써 빛을 남겨놓을 수 있을 때 시민들은 삶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특별기획전이 지난해 말 시작으로 오는 2월 말까지 수원박물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다. 정월 나혜석은 100여 년 전 시대에 살았던 수원의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다. 최초의 전업작가로 물적 토대를 구축한 선구자였다. 최초의 여성유화가요 판화작가다. 유화개인전을 최초로 열었다. 근래에는 최초의 여성소설가로도 조명을 받고 있다. 그밖에 독립운동가, 신여성으로 여성해방론자라고도 회자 되고 있다. 이름 앞에 ‘최초’라는 낱말이 많이 붙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53세로 세상을 불우하게 떠난 비극적 인물인 나혜석은 ‘나는 지금 내 고향 수원에서 불꽃 같은 내 삶을 이야기’하듯이 몇 갈래 섹션으로 구분 지어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진품 유화는 리움미술관에서 대여한 1935년대 작품으로 알려진 화령전 작약 한 점만이 유일하다. 대부분 잡지에 게재된 나혜석의 문학작품들, 문학지 표지그림과 신문 삽화들이다. 그가 연속 입상의 영광을 차지한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 실린 그림 몇 점이 전부다. 대부분 사촌오빠 등 나씨 집안의 가족관계 계보, 야학을 하고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하던 3·1운동 재판기록 등과 당시 다양하게 교류를 나눈 이들의 면면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학창생활을 보여주는 그의 학적부와 유럽 여행기 등도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미술계보다 문학을 통해 이광수, 염상섭, 김동환, 김일엽 등과의 교류가 잦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가 남긴 유화작품이 주 볼거리로 전시되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쉽다. 수원시가 그간 나혜석을 재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이나 미술공모전을 해마다 개최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남긴 미술작품 수집에는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혜석이 남긴 그림작품 하나도 없는 수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껏 문제제기가 없었던 예술문화인의 책임도 크다. 이제사 누굴 탓하고자 하는 일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나혜석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조명하려면 그의 작품 확보에 나서는 일이 시급하다. 기념관 건립은 그다음이다. 현재 나혜석기념관을 짓기 위한 용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 하드웨어가 먼저인가. 토목공사가 먼저일 수 없다. 그 안에 담길 내용물을 확실하게 확보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활기 넘치는 예술문화공간을 누가 마다하랴. 그렇지만 그건 아니다. 

정월 나혜석, 그의 이름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나혜석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예술이라는 글 속에 넣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명백해진다. 당시 유교의 예술천시사상이 만연한 사회에서 전업 여류화가로서의 활동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삶을 두고 위대하다는 찬사를 보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상찬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은 복이다. 삶의 궤적(軌跡)을 물론 그가 일궈놓은 예술과 문화에 까탈을 부리고자 함이 아니다. 독립기념관을 먼저 짓고 유물을 수집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담겨질 유물을 먼저 수집하고, 분류 작업을 하면서 그것을 감안하여 내부 설계가 이뤄졌다. 벽돌을 모으기만 해서 집을 지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물을 모았다고 해서 기념관을 곧바로 지을 수는 없다. 유물의 진위를 가리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나혜석을 보면서 한 선구자의 후세에 미치는 영향이 이처럼 큰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시민만이 아니라 미술인들의 고른 굄을 받고 있기에 그렇다. 건물 하나 짓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그릇에 담을 내용물을 마련하는 일은 어렵다. 건축공사보다 전시할 유물확보가 먼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