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혜석은 1896년 4월 15일 부친 나기정 모친 최시의 사이에 출생한 2남3녀 중 둘째딸로서 아명은 명순이였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신퉁면 신창리이며 태어난 곳은 수원 남수리라 했다. 수원3·1 여학교(지금의 매향여고)를 졸업하고 1910년 서울 진명여학교에 입학했다. 17세 때 동경여자미술전문대에 유학했다. 그의 애국활동은 1915년 여자일본유학생으로 나혜석과 김정하가 조선여자 친목회를 창립하며 시작했다. 그리고 잡지 (여자계)를 발행했다.
1919년 2월 5일 동경유학생들을 결속하며 성금 125원을 보내기도 했다. 때마침 세계1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는 강화회의가 열릴 때였다. 이화학당 안에서는 미국 유학수속 중인 신마실라를 우리나라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의논을 하기 위해 비밀화합이 거듭됐다. 동경유학생인 나혜석이 여류화가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로 인해 나혜석은 옥고를 치르면서 독방변기통에 올라가 가슴에 1906이라는 번호표가 붙은 최은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은희가 조선일보 최초의 여기자가 되면서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졌다.
나혜석은 1921년 3월 19일 20일 동안 경성일보 내청각을 빌어 경성일보와 그 자매지인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그 주인공이 여자였기 때문에 그 인기는 대단했다. 풍경화를 중심으로 수년간 모아두었던 약 7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고 학생의 단체입장 사회 각계의 인사들 각국의 영사관원 미국의 남녀 선교사 하며 일본인 관객들도 많았다.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를 참고하면 첫날의 입장자는 1000여 명이요 다음날에는 내청각을 싸고돌도록 대성항을 이루며 오후 3시까지에 5~6000명의 인파가 밀려들었다고 했다. 또한 전시품중 350원의 최고가격인 ‘신춘’은 경쟁 속에 팔렸으며 이 밖에도 예약딱지가 붙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조선 미술전 관람회에는 1회에 입선 2,3회에 4등 4회에 3등 5회에 특선, 총 출품 128점 중 금 딱지 11개에서 한 개를 차지한 여성 최초의 특선으로 개가를 올렸다. 그녀의 동경 ‘이과전’ 당선작인 ‘천후궁’은 부군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있을 때 짱골라 인력거 위에 화구를 싣고 다니며 그린 것인데 일본 궁내성에서 사갔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 ‘정원’은 귀국도중 이과전에 출품하며 당선된 것으로 그때 이왕가에서 사들여 갔다는 것이다. 동경의 ‘이과전’이라 하면 세계 어느나라 국전보다도 급수가 높을망정 결단코 손색이 없다는 국제적 정평이 있는 만큼 이에 당선하는 것은 화가로서의 최대의 희망이요 최고의 명예인 것이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유화를 개척한 최초의 여성이였다. 그는 단편소설과 수필 등을 기고했고 시도 쓰고 확고한 자기주장을 세운 여권론도 여러 번 발표해 신문학운동대열에도 앞장섰던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
나혜석은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렸다. 여신처럼 떠받드는 다정한 남편이기도 했으나 섬세한 정서적 감정에는 이해가 잘 안 가는 아쉬움이 있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고백이다. 그녀가 1927년 외유 중에 발칸해변에서 최은희에게 보낸 그림엽서에 “동생은 이 그림의 절경을 보라 여름 하늘의 흰 구름처럼 뭉게돼 오르는 그 신바람에 마음을 적실 애인이 그대에게는 있는가?”로 쓴 것을 보면 “나는 없노라” 하는 듯 허전해 보이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아마도 그녀의 정열이 그 자연의 황홀감에 잠깐 이성을 잃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예술 극치의 혼을 합하는 부부가 되지 못한 데서 실패의 원인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최은희는 자서전에 나혜석의 주검을 추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아일보 전 주필 고재욱의 부인 김숙배 여사와 함께 추모회라도 한번 열어 드리자고 벼르기만 했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현재 수원박물관에서 열리는 나혜석 특별기획전 ‘추모전시회’에 필자의 어머니 최은희의 뜻을 바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