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극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간다. 일단, 과거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시간의 간격을 각오하면 좀 느긋해진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왠지 불안해지는 워커홀릭에 빠진 현대인이라면 사극에서 주는 느림에 치유 받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옛사람들의 대화법도 마음에 든다. 미사여구가 많고 존칭, 호칭이 상대에 따라, 또는 관계에 따라 달라져서 힘들고 복잡하지만 그런 암묵적 룰에 따라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상대에게 뜻하지 않는 말로 상처를 주는 일은 훨씬 덜 할 것 같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그런 호칭이나 어미를 통해 격식을 갖추려는 것에서 이미 내가 할 말을 다시 곱씹을 수 있는 여유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사극의 재미 중에 볼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한복에는 천연염색의 자연스러운 색이 서로 부딪힘이 없으면서 화사하고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선이 주는 오묘한 미적 긴장감은 해상도 좋은 화질의 티브이를 갖고 싶은 욕심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궁궐이나 한옥의 조형적 세련미는 물론이거니와 옛사람들의 자유분방함과 호탕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옥의 구조도 좋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들이 쌓인 빛바랜 한옥의 마루 위에 양반집 규수가 살포시 손을 포개고 앉아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는 먹빛으로 넘쳐나는 묵화가 오버랩 된다.
요즘 ‘해를 품은 달’이라는 사극에 푹 빠져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게다. 언젠가 달의 기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해가 있으므로 빛을 발할 수 있지만, 해의 존재를 잊을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함과 따스함, 거기에다 달빛은 밤이 주는 신비로움에 아스라함을 더한다.
이 그림은 달빛과 달빛 아래 세상이 만들어 가는 사랑노래를 표현했다. 달빛의 풍요로움이 온 세상의 색들을 청색의 모노톤으로 감싸고 있고 산을 휘감아 내려오는 물줄기는 희다. 마을에서 산책 나온 연인이 달빛이 있는 밤을 즐기고 있다. 다른 어떤 그림보다 화면구상이나 작업의 전 과정이 직관적으로 이루어졌던 그림이라 더욱 애착이 가는 그림이다.
올해도 달의 기운을 맘껏 누리는 한 해가 됐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