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의 그림이 있는 풍경] 길위에서-바람언덕Ⅱ

▲ 길위에서-바람언덕II / 40×80cm / Acrylic on Canvas / 2011
그해 삼월의 끝자락은 유난히 차가웠다. 대지의 생명이 움트고 더불어 사람들도 기지개를 켜며 따뜻한 봄을 맞이할 때이건만 땅은 아직 얼어붙었고 거리를 나다니는 이들의 발걸음도 무겁기만 했다. 며칠을 머물던 산사를 내려오면서 회색빛 겨울기운이 괜히 서글펐던 그해 삼월이 생각난다. 그래서였을까? 핸들을 돌려 섬진강 쪽으로 향했다. 무엇인가가 그리웠나 보다. 따스한 봄기운에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던 것일까, 향기로운 꽃향기에 그저 취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찌 되었든 애초에 목적지가 없었던 여행이라 나의 손과 발은 자유로움을 맘껏 즐기며 운전대를 돌리고 있었다.

아…. 섬진강! 얼마나 아껴두었던 곳인가?

마치 어린 시절 가장 맛난 과자를 맨 나중에 설레는 마음으로 입안에 넣었던 것처럼, 마치 새로 구한 귀한 원두로 한 방울 한 방울 정성껏 내린 커피 앞에서는 원두를 분쇄하는 일부터 하나의 의식이 되는 것처럼, 나에게 섬진강은 그저 바람 한 번 쐬러 가는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쌍계사, 화개장터까지 내려오니 길 위에 봄내음이 가득하다. 한달음에 섬진강 줄기까지 달리다가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꽃천지다. 꽃산이다. 산이 하늘과 맞닿는 곳의 실루엣까지 모두 꽃이다. 차 문을 열고 땅 위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밀려오는 매화 향에 잠시 넋을 잃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꽃길을 걷는다. 걷고 또 걸어도 길의 끝에는 또 다른 꽃산이 있다. 감성의 정점. 오감이 한꺼번에 확 열리는 느낌이다.

언젠가 섬진강 주변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예술인들을 소개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왜 그들이 잠시 다니러 온 길에 정착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섬진강에서는 모든 것이 열린다. 섬진강에서는 나의 모든 선함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섬진강에서는 나의 위선과 비굴함에 한없이 작아지며 우울해하지 않아도 된다.

섬진강은 이 모든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넉넉한 따스함이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