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당인 한나라당은 그동안의 국민으로부터의 불신을 씻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박근혜 전당대표를 위원장으로 선출 전권을 위임하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공천자들을 선출,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민주통합당은 당지도부를 바꾸었는데 대표의 최고득점자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선출 된 것이다. 총선거의 총 지휘자가 여당이나 야당 모두가 여성이 맡은 것이다. 아마도 12월 대선의 여당 대통령 후보는 박근혜가 유력한 가운데 야당 대통령 후보도 한명숙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선거 대책의 지휘봉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정치의 해라는 이름이 붙어지면서 존스트워드 밀이 생각나는 것이다. 밀은 1806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다. J 벤삼의 제자이며 ‘경제학강요’의 저술자인 아버지 J 밀과 산책하며 경제를 배웠다. 1823년 아버지와 함께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던 그가 1830년 약종상을 하는 친구 죤 테일러의 초청을 받고 그의 집에 갔다가 그 친구의 아내 하리엣 테일러를 만났는데 사랑은 첫눈에 시작된다고 했던가 둘은 열애에 빠지게 된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청순한 연애를 20년간 지속하였다. 1851년 죤 테일러가 사망한 뒤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1858년 남유럽을 여행하던 그의 아내 하리엣 테일러가 생애를 마친다. 그곳 블란서 남방인 아비뇽에서 밀은 그 이듬해 저서를 발간한다.
그 책이 유명한 ‘자유론- On Liberty'이다. 이 책 서문에 밀은 아내와 더불어 썼다고 했다. 내용에 나타난 글의 흐름을 보면 유부녀와의 사랑에 대한 사회의 도덕적 비난에 대한 반항으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양심의 자유라든가 생활설계의 자유라든가 개인과 개인의 단결 자유란 제목이 그들의 사랑을 부르짖는 모습인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한 한 자유로워야 한다고 하고 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타인에게 해를 미치지 않게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65년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며 국회의원이 되었고 1867년에 선거법개정안을 내놓으면서 선거권을 남성에서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망측한 일이 다 있다. 여자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하며 그 발언을 들어보자고 방청객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개정법은 결국 194:73으로 부결되었다. 그 후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1925년에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정치참여는 1919년 3·1독립혁명에 가담하면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뒤 우리나라 여성들은 근우회를 조직했다. 1927년 좌·우 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가 탄생되면서 이상재 조선일보사장이 단 하나의 여기자인 최은희에게 신간회에 많은 여성이 참여하게 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최은희 여기자는 얼마 뒤 새로 취임한 신석우 사장에게 졸라 자금을 마련하여 좌·우 합작여성단체를 창립한 것이다. 독립운동에 좌파와 우파가 갈라서서는 안 되는 단결하자는 것이었다. 현재의 시국에 귀감이 될 여성 정치 참여운동가라 하겠다.
해방 뒤 최은희는 민정장관에 안재홍 전 조선일보사장이 취임함으로 민주시대가 왔으니 여성들도 과감히 사회진출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오정화를 교동국민학교교장으로 손정규를 경기여고 교장에 그리고 서대문 보건소 소장도 여성으로 추천하는 등 자국민당 부당수 겸 선전부장 그리고 서울시 당위원장으로 정계에 뛰어들어 선거운동에 적극성을 보였다. 내가 중앙대에 입학하며 장학금을 받으며 학위까지 획득하고 교수까지 된 배경이기도 하다.
최은희는 여성운동에 열을 올리면서 한옥의 기둥에 '여성의 지위가 높아져야 나라가 바로선다' '여권확립은 민주발전의 초석' 등의 슬로건을 벽보로 대치하였다. 오늘날 여성의 정치시대가 열리고 여성의 정치참여가 활성화된 역사적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 그 뿌리를 찾아 여성들의 활동이 우리나라 발전에 큰 몫을 해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