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문병을 다녀와서

필자의 외할머니는 올해 연세가 83살 이시다.독실한 모태신앙의 가정에서 유복하게 성장해서 백제왕손이자모태신앙인 대대로 양반가문에 시집왔으나 6.25때 남편을 여의고여의고 54년동안 홀로 나의 어머니를 비롯해 3남매를 키워오신외할머니의 병상은 유난히도 쓸쓸해 보였다.부양문제로 외삼촌들이 자주 다투자 어머니께서 모시기로 하고같이 생활하였으나 지난해 강화도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셨다.하지만 말년에 너무나도 힘든삶을...거의 원자폭탄과도 같은 인생을 살아오셨기에 요즘은 신앙심을 잃으신지 오래다. 그러나 외할머님의 어린시절과 시집살이는 아우토반 저리가라일만큼 순탄한 인생항로였다고 한다.상당한 부잣집이었기에 외할아버지의 겸손함과 배려하는 마음에끌러 청혼을 했다고 한다.40년대 후엽 당시 1인당 소득이 50달러도 채 안되는 시절이었지만 굶주리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특히 흉작에 농지개혁으로 식량배급이 이루어지지않던 농촌지역마다 쌀과 밀가루등을 단체를 통해 분배해주셨다고 한다. 재산이 너무 많았기에 '욕심이 화를 부르는 법'이라며 가르침을받았던 외할머니 가족들은 주일예배를 비롯해 헌신예배, 각종기도회를 빠지지않고 참석하여 남들보다 훨씬 많은 봉헌을 했다고 회고하셨다.뿐만아니라 걸인들이나 먹을것을 구걸하는 사람들에게도 후한접대를 해주셨다고 한다.늘 베풀고 나누며 살아가야한다는 교훈을 받들어 그렇게 이웃과친해지기도 하는등 마당발가족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개척교회를 섬기셨는데 지금 그 교회는 순복음교회에 버금가는대성전으로 성장했다.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전 유언을 남기셨는데 전 재산을 사회기부하거나 가난한 민초들을 위해 써달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친지와 이웃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셨다.참고로 필자의 외조부께서는 1950년 9월27일, 그러니까 서울수복을하루앞두고 북한군들한테잡혀 모진고문끝에 숨을 거두셨다.유족들은 그분의 뜻을 받아들였다고 한다.친정이 부자였기때문에 유산을 물려받지않고 사회의 각 단체에기부하셨던 고지식한 분이셨다.당시 혜화동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자동네로 외할아버지가족의집은 저택이라 표현함이 옳을 정도로 동대문에서 가장 크고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당시 최첨단이라 불릴정도로 아니 당시만해도 생소하다고 볼 수있는 물건들이 두루 갖추어졌다고 한다.의료선교사와 유학시절에도 경제활동을 하면서 벌어들인 외화도상당했다고 한다.결혼하기 전 교회청년부 회장과 여러 직책을 맡을만큼 교회일도열성적이셨다고 한다.그런 환경에서도 식단은 꽁보리밥에 된장국이 주 메뉴였으며 반찬도 세 가지를 넘는적이 없었다.어렸을때 바닷가재와 케비어등 서양 고급음식과 한국 궁중요리를자주 먹어보았지만 시집와서 서방과 함께먹은 된장국맛만 못했다고 회고하신 분... 80을 갓 넘기시던 2년 전만 하더라도 어린시절의 기억을 뚜렷히하실정도로 정정하셨으나 이제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노쇠해지신모습에 어머님께서는 대성통곡을 하시더랍니다.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이 무슨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냐고.이렇게 우리가족들은 하늘을 원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