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않은 외할아버지의 비화
북한은 공산정부가 들어서기전인 40년대 전반까지만해도 극동 아의 예루살렘이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알고있는 사실이다.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진곳도 평양이고 외국인 선교사가 맨 처음 정착한곳도 평양이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역사에 기록되어있는 제럴드셔먼호라는 이양선이 첫 선을 보인것도 평양의 대동강이었으니 말이다. 김일성의 부모가 모두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고 김일성 또한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부모의 신앙에 적극적이었다. 평양교회 장로였다는 그(김일성의 부친)는 평소에도 슈바이처를 존경했다며 필자의 조부님을 친자식처럼대하며 선교자금도 대주셨다고한다. 선교사로 떠나기전 김일성이 뷔야츠크에서 득남을했다는 소식에 장로님을따라 김일성을뵈러 소련에잠깐 들렀지만 그지역 선교는하지않았다. 당시에는 미국과동맹으로 일본과독일에 선전하고있었기에 조부님께서는 다시 흑룡강을건너 중국으로향했다. 선교사로떠나려는 조부님을접견한 김일성은 매우 반갑게 맞았고 훌륭한일을한다며 악수를청하기도 했다. 따라서 훗날 남한의 주민들은 백범김구보다 나의 조부님을 더 신뢰했다고 한다. 조부님은 6.25가발발한지 3개월후 돌아가셨지만 생존할수 있는 기회는 여러번이었다고 한다. 백범이 암살된후 조부님은 북한선교를 검토하기도했으나 뜻을 이루기전에 북한군의남침으로 조부님의 자료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되었다. 당시 유일하게생존하고계셨던 외할아버지의 친구분은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억력과체력이좋으셨고 말씀을 또박또박하실정도로 정정하셨다 내가 지금까지도 건강하게살수있었던것은 다 그 친구덕이었다고 말씀하시셨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 그 노인의말이 믿어지지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당시 김일성일가와찍은 사진을보여주자 비로써 나는 조부님이 어떠한분이셨는가를 알게된 것이다. 이때의 갓난아이가 지금의 김정일이란말인가! '왜 이것을 이제서야알려주시는겁니까?' 내가 여태까지 숨기고있었던것은 이런사진을 함부로공개했다가는 국보법에 걸릴까봐 쉬쉬해왔던거야 하지만 당시는 공산정권이 수립되기전아니었습니까... 내가 살면 얼마나살겠는가!죽기전에 이 친구의 자손들을 만나 봐야 겠다는 생각뿐이었지 연해주에서 임시예배당을짓고 그곳에서 생활하였는데 어찌나 감명깊게 설교를하던지 김일성 조차도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고 하시더라. 해방이되자 귀국하였을때 그는 31살의 나이로 대학병원을 설립 하고 원장을 지내셨다. 그는 의술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력을 인정한 자유당정부는 그를 이승만 대통령 주치의로 영입하려했으나 완강히 거절했다. 이친구가 죽자 주민들은 비석을세워주었는데 그마져 폭격으로 소실되어버렸다네. 정말 착찹한심정이 아닐수가없다. 우리는 왜 같은민족끼리갈라져 이러한비극을 초래할수밖에없는 것인가... 남북통일이되지않는 한 그분의 자료를찾기란 불가능하다고한다. 우리모두 북한이 개방될수있기를 기도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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