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 모리가와 준, 홍난파의 친일을 묻습니다

[김영조의 우리문화편지]

조선의 음악은 느려터지고 정신이 해이하여 서양 것만 못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노래를 작곡한 홍난파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입니다. 서울 종로 홍파동에는 우리나라 가곡의 선구자 홍난파(1898-1941) 선생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살던 집이 있습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아담한 서양식 2층 벽돌집 안에서는 요즈음 작은 음악회 등이 열리고 있지요. 집안에는 홍난파 선생의 일대기가 판넬로 전시 되어 있는데 그 한 모퉁이에 그의 친일행적도 적혀있습니다.

그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주옥같은 우리의 음악을 남겼다면 그는 영원히 겨레의 올곧은 음악가로 자리매김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홍난파(1898.4.10~1941.8.30)는 수원의 남양 홍씨 가문에서 태어나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한 뒤 1918년 스무 살 때 일본에 유학길에 오릅니다.

“조선음악 대부분이 매우 더디고 느려서 해이하고 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 기분에 싸여 있지만 서양의 음악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쾌하고 장중하다”는 말로 조선음악을 비판하면서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계몽·보급하려 한 그를 가리켜 조선음악의 역사인식이 희박한 사람이라는 평을 하고 있지요.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부터 그의 민족음악개량운동은 친일음악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했으며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모리가와 준(森川潤)이란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한 뒤 ‘악단과 직업을 통하여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이바지하고 신체제운동을 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의 23명 평의원 가운데 일곱 명밖에 안 되는 조선음악인 평의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가담했으며, ‘황국정신을 되새기며(皇國精神にかへれ)’, ‘부인애국의 노래(婦人愛國の歌)’,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태평양행진곡(太平洋行進曲)’ 등의 친일 노래와 ‘희망의 아침’, ‘지나사변과 음악’ 같은 친일 글도 열심히 써댔지요.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광복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 저 멀리 만주 벌판과 상하이에서는 그래도 조국을 찾겠다고 발버둥 치던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화가는 붓으로, 문학가는 시와 소설로, 음악가는 노래로 일제에 빌붙어 찬양하던 그 행위와 양심을 겨레의 올 곧은 역사는 준엄히 심판할 것입니다. 오늘은 모리가와준 아니 홍난파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