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나혜석연구 팔 걷어 부치고 나섰다

[김훈동 칼럼]

▲ 수원예총 회장
수원이 낳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자 시인·소설가인 나혜석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학회가 결성됐다. 지난 1일 수원화성박물관 영상교육실에서 100여 명의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나혜석학회 창립’을 선언했다. 나혜석을 비롯한 한국의 근대 사회·문화·예술에 대하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학문적 발전 및 유대강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멀리 부산을 비롯하여 전주, 대전, 강릉, 서울 등 경향각지에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10장 35조에 걸친 나혜석학회 회칙과 연구과정에서 준수할 연구윤리규정, 편집규정 등을 의결했다. 회칙에 따라 회장과 감사 등 임원을 선출하고 첫발을 내디뎠다. 석사 이상의 학력을 지닌 연구자를 정회원으로 하여 본격적인 나혜석 연구에 박차를 가하리라 기대가 크다. 특히 이날의 백미(白眉)는 초당대 서정자 명예교수가 어렵게 입수한 ‘나혜석의 친필 편지 엽서 6통과 파리로 떠나기 전에 동래온천에서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나혜석의 육필은 이제껏 없었다. 서명이나 사인 이외에는 없었기에 더욱 값지다. 처음 공개된 나혜석의 편지나 엽서에 나타난 친필은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다.

1931년 11월 29일, 서른다섯의 나혜석이 일본인 지인에게 조선미술대전에 특선하고 일본 제국미술대전에 입선한 ‘정원(庭園)’이란 제목의 유화작품을 팔기 위해서 보낸 편지도 공개됐다. 그는 “정원은 파리 체재 중에 그린 것으로서 자신 있는 회심작입니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만약 어르신 댁이 안 되면 따로 사들여 주실 분을 소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정원’ 미술작품은 이왕가에서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의 흑백사진으로만 이 그림의 완성도를 짐작할 뿐이라 안타깝다. 처음 공개되는 나혜석 관련 자료이기에 이날 나혜석학회 창립의 의미가 더 두터웠다. 나혜석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게 없다. 진품으로 확인된 작품도 10여 점뿐이다. 이번에 발견된 친필편지는 나혜석연구에 귀한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연 2회 발간될 학회지『나혜석연구』를 통해 더 상세한 내용이 게재되리라 본다. 이밖에 연구 논문, 서평, 자료 및 학술기획물 및 학회활동 등이 담겨질 계획이다.

기조강연에 나선 김남조 시인도 ‘나혜석이 선진적인 생각으로 시대를 앞서 간 그의 발자취를 높이 평가하며 시, 소설 등을 쓴 그의 문학적 업적도 미술 못지않게 뛰어나다’고 밝혔다.

나혜석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답사가 이어졌다. 그가 제1회로 졸업한 매향학교 전신인 삼일여학교 터,『냇물』시를 짓던 화홍문, 수원군수원면신풍리 생가터, 종로교회,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화령전 작약』을 그린 화령전, 수원에서 처음으로 미술전을 열었던 포교당 등을 순회하며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으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나혜석은 유럽여행 이후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주최, 중외일보사 수원지국 후원’으로 귀국전시회를 불교포교당 회랑에서 가졌다. 수원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서양화 전시회였다.

이어진 만찬장에는 60여 명의 회원들이 끝까지 자리를 하여 총회석상에서 못다한 이야기와 학회가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담소가 오갔다. 나혜석의 해외 발자취를 따라 해외투어를 통해 부족한 자료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한다. 11월에는 학회발족 후 처음으로 심포지엄을 개최 하는 등 나혜석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야심 찬 계획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혜석학회가 창립되는 데는 ‘나혜석 기념전’을 개최한 수원박물관의 역할이 컸다. 뒤늦게나마 잘한 일이다. 이제 85년이 지난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오사카 모모야마 학원을 직접 방문하여 나혜석 관련 자료나 이에 버금가는 흔적을 찾아 나서야 한다. 자료를 흔쾌히 제공해 준 일본 구마모토 대학 우라카와 도쿠에 강사를 만나 알려지지 않은 ‘나혜석 자료’가 더 없는지를 밝히는 행보가 절실하다. 이 또한 나혜석학회가 시급히 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