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40년 정승살이에 남은 것은 비바람 피할 초가 두 칸입니다

[김영조의 우리문화 편지]
 
가을에 만나볼 청백리, 오리 이원익

"알았다. 40년 동안 정승 노릇을 하였는데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에 살다니 그의 청렴결백함과 안빈낙도함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이 공덕(功德)이 있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과 검소를 백관(百官)이 본받는다면 어찌 민생(民生)이 곤궁해질 염려가 있겠는가. 나이가 많은 원로는 도리상 우대해야 하며 그 검소한 덕도 표창해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해도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주도록 하고 또 호부(戶部)로 하여금 무명 이불과 명주 요를 사급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숭상하는 바를 이루게 하라"

이는 《승정원일기》 인조 9년 (1631)에 강홍중이 이원익의 병세를 임금에게 보고한 자리에서 인조가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강홍중은 보고하기를 거처하고 있는 집은 잡목으로 얽어 만든 두 칸 초가집으로서 겨우 몸을 붙이고 살 정도인데 낮고 좁아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그 앞에 가족들이 거처하는 곳은 더욱 기울고 누추하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여 거의 사람이 견디고 살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또 들으니, 살고 있는 땅도 여러 대 선산 아래라서 곁에 한 뙈기의 밭도 없고 또한 몇 명의 종도 없이 온 가족이 단지 달마다 주는 쌀로 겨우 연명한다”라고 보고합니다.

40년 정승 살이 치고는 너무나 하잘 것 없는 집에서 병치레를 하는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익(1547~1634)입니다. 그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철저한 안빈낙도를 실천하여 그 속에서 기쁨을 찾은 보기 드문 조선의 청백리로 알려졌지요.

오리 이원익 선생의 후손들이 만든 충현박물관(경기도 광명시)에서는 해마다 9~10월에 이원익 선생과 관련한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