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1
한나라당 내 개혁 성향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은 지난 9월 21일 각 의원실에 접수된 선물을 모아 복지기관에 보내는 행사를 가졌다.
농림해양수산위 소속인 이철우 열린우리당 의원(경기 포천?연천)은 아예 추석을 보름 정도 남기고 피감기관에 일제히 팩스를 발송했다. 거기에는 “추석선물은 절대 보내지 말라. 미리 책정된 예산이 있다면 복지기관에 보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열린 14차 최고위원회에서 추석선물과 관련해 △민주노동당은 피감기관과 업무관련 단체로부터 일체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보내오는 모든 선물은 목록을 작성해 공표할 것입니다. △적용대상은 당의 모든 선출직 당직자 및 공직자, 보좌관, 실장급 간부입니다 등 3가지 방침을 정했다.
그렇다면 이른바 일부 정치인과 정당의 '한가위 선물 규칙'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을까. 이철우 의원은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힌 이후 선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김배곤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은 "총리실에서 잘 모르고 당 정책연구위원에게 배 한 상자를 보낸 경우가 있었지만 당 방침에 따라 그대로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풍경 2
17대 국회에서 추석선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의원실의 보좌관은 "과거엔 선물이 너무 많이 들어와 복도 밖에 쌓아둘 정도였다"면서 "의원뿐만 아니라 보좌관까지 퇴근할 때 양손에 한가득 선물을 들고가는 풍경이 수없이 목격됐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의장이나 상임위원장이 의원들에게 의례적인 선물을 돌리거나 의원들이 출신지역의 특산물을 친분이 있는 의원에게 돌리는 정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추석선물이 국회에서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취재 결과 △선거법상 강력한 금지와 중앙정부의 암행감찰 △선물 안주고 안받기 문화풍토의 정착 △후원회 개최 금지에 따른 의원들의 재정압박 등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됐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용희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선거 당시 자원봉사로 뛰었던 운동원들에게 1천5백원 하는 국회수첩 한 권씩이라도 선물로 주려고 중앙선관위와 영동선관위에 알아봤지만 결국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사회적 대의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고마운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감사를 표시하는 행위마저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풍경 3
여의도통신 기자는 지난 9월 20일 밤 의원회관에서 한 지방출신 초선의원의 '왕초보' 보좌관을 만났다.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그 보좌관은 기자에게 "지방지 기자들에게 추석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서 상담(?)을 해 왔다.
"예전에는 다들 거마비로 얼마씩 줬다고 들었다. 당 차원에서도 기자들한테 챙겨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있는 기자들도 그런 관행을 알고 있을 것 아니냐. 까놓고 말하자.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 주자니 기존 관행에 젖어있는 기자들이 언짢아 할 것 같아 망설여지고, 주자니 또 얼마나 줘야 하는지 감이 안 온다."
기자가 "원칙적으로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해 주자 그 보좌관은 "솔직히 지금까지 지방지 기자들이 기사 협조 안 해준 것도 다 그런 것 때문 아니냐"면서 도리어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는 "줘야 한다면 어떻게 줘야 하느냐. 따로 줘야 하느냐, 같이 불러서 줘야 하느냐"는 상당히 실용적인(?) 질문까지 던진 뒤 "그래도 5만원짜리 상품권 정도는 전달해야 할 것 같다"는 말로 스스로 답했다.
#풍경 4
지난 9월 21일 밤 9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의 의원회관. 코앞으로 다가온 국정감사 준비 때문인지 대다수 의원실의 불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하루 종일 북적이던 의원회관이 한산해지자 넥타이에 정장을 한 채 근무하던 보좌진들도 긴장이 풀렸는지 하나둘 넥타이를 풀어헤치거나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였다. 여의도통신 기자는 1층 로비 옆의 비상용 엘리베이터에서 양손에 선물 꾸러미를 든 30대 중반의 사내 2명을 발견했다. 신분을 밝히길 극구 꺼린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전통주. 그 중 한 명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약소한 선물입니다.”
암행감찰의 영향 때문인지 낮 시간을 피해 선물을 돌리고 있었던 것일까. 과거에 비해 그 정도가 훨씬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의원실에는 여전히 선물이 배달되고 있었다.
(여의도통신=김동현 김봉수 김은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