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
러시아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21개 공화국 중에 '사하공화국'이란 나라가 있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의 4분의 1과 엄청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보물국'(寶物國)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독특한 정치적 전통이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현 국회의장이 차기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관례가 바로 그것이다. 현 사하공화국 국회의장의 이름은 알렉산더. 그의 할아버지는 김씨 성을 가진 고려인이다.
그런데 고려인의 후예인 '알렉산더 김'에게는 아픈 추억이 있다. 국회부의장 시절이던 올 초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문전박대'의 수모를 당한 것이다. 사하공화국의 석유와 가스를 욕심내는 일본과 중국의 발길이 잦아지자 알렉산더 김은 이왕이면 할아버지의 나라와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으로 방한했다. 그러나 큰 기대를 안고 면담을 신청했지만 산업자원부 장관은 물론이고 차관까지 바쁘다면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두 달 전쯤 있었던 한 조찬강연에서 이광규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 날 이광규 이사장은 재외동포를 대하는 우리 정부와 국민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러나 자세히 따지고 보면 너무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물안 개구리'식 사고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당시 그는 "우리에겐 더 많은 '알렉산더 김'이 있다"면서 "1백73개국의 7백만 재외동포가 바로 그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들을 지렛대로 삼는다면 '기막힌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덧붙였다.
지난 11월 2일 미국 대선이 부시의 승리로 끝나자 우리 언론은 대미 의원 외교를 펼쳐야 한다느니 대미 외교 라인을 개척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요란을 떨었던 적이 있다. 전형적인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식 보도였음은 물론이거니와,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조차 황당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 언론이 거명한 대미 외교 인맥이란 것이 기껏해야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학자, 외교관, 워싱턴 특파원 출신 정치인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보좌관에 한국계 미국인을 임명했지만 정작 그는 '무늬만 한국계'인 미국 패권주의 옹호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였을까.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한미간 주요 이슈를 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자신들의 외교력에만 의지하지 말고 미국 내 한인 동포들의 정치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김동석 한인유권자센터 사무총장의 주장은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문화일보 11월 23일자 참조). 김 총장은 "각 정당의 후보들은 소수인종의 투표율을 보고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을 받아들인다"면서 "높은 투표율로 한인사회의 권익옹호뿐만 아니라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미 의회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이 김 총장의 고백이다. 약 60만명의 미국 내 합법적 시민권자 중 유권자 등록을 해 투표권을 얻은 비율은 32%이고, 그나마 투표율은 1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대계 78%, 베트남 34%, 흑인 40%, 중국인 38% 등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치다. 재외동포를 조국을 등지고 떠난 일종의 배신자나 '예비 간첩' 정도로 인식하고 취급했던 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 11월 24일부터 한 텔레비전에서 1천2백년 전 해상제국을 건설하고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재외동포' 장보고를 극화한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라방(新羅坊), 신라원(新羅院), 신라소(新羅所) 신라관(新羅館)…. 장보고의 대활약을 가능케 했던 당나라 내의 교두보였음은 물론이다. 재외동포정책이 대한민국의 사활이 걸린 21세기 생존전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거니와, 우리는 가슴을 열고 '알렉산더 김'과 '장보고'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