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사고, 안전불감증의 인재(人災)다

[김훈동 칼럼]

▲ 수원예총 회장
오늘은 4월의 마지막 날이다. 미국 태생의 영국시인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가 있다. 매우 어렵고 길어서 끝까지 감상한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첫 소절만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며 환멸과 불안과 죽음을 음울하게 읊고 있다.

안산에 마련된 세월호 침몰 희생자합동분향소에 조문을 다녀왔다. 추모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생령(生靈)들의 영정을 보는 내내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이 글을 쓰는 것조차 죄스럽고 미안하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삼가 명복을 빈다. 생생한 자식의 모습을 가슴에 묻고 고통에 떨고 있는 유가족을 어떻게 보듬어 줄 수 있을까. 다 키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피를 토하는 슬픔, 어떤 방법으로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우린 모두 죄인 된 몸으로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시간이 흘러가며 터져 나오는 해운업계의 비리는 우릴 더욱 분노케 한다. 일본에서 쓰던 20년 된 고물(古物) 여객선을 들여와 구조물을 개조하여 ‘이상 없다’는 해양수산부의 항해권 승인을 받아 운항한 것이 잘못이다. 44개의 구명정 대부분이 작동되지도 않을 수준의 대형 여객선이 어찌 승인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과적(過積)에, 컨테이너나 차량은 결박장치도 제대로 되지 않고 운행하였다니 안전을 도외시한 부실덩어리 배다. 오너(owner)는 수천억 원대의 재산가인데 선장은 1년 계약에 고작 270만원의 월급쟁이니 책임감이 있을 리 만무하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명령을 내려야할 선장이 제 목숨 먼저 구하고자 제복도 갈아입고 떠나는 몰염치를 저질렀다. 치욕스럽고 허탈하다.

안전운항 감독을 책임지는 해운조합 이사장은 12명 중 무려 10명이 해수부 관료출신이다. 구조물 개조 승인, 평형수(平衡水)증가 등을 감독하는 한국선급, 선박도면 승인을 맡은 선박안전기술공단도 그렇다. 두 말할 나위없는 인재(人災)다. 배에 몇 명이나 탔는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그저 부끄럽고 답답하다.

40여 년간 민방위훈련을 해온 나라의 재난 대응이라기에는 너무 안이했다. 생명을 위협받는 급박한 상황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어린 학생들을 뒤로 한 채 저들만 아는 통로로 먼저 도망쳐 나온 게 선장과 선원들이 평소에 받은 훈련이란 말인가. 바로 7m옆 객실 승객을 버려두고 자기들끼리만 탈출했다니 가증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일그러진 기성세대의 한 단면이다. 가슴이 먹먹하고 씁쓸하다. 

관료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운항허가권을 비롯해 지도·감독권을 가진 관료집단이나 전관예우를 받아왔던 관료출신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공직은 공적 권한과 자원을 사용하는 자리다. 행정은 이런 권한과 자원을 사용하는 일이다. 이른바 ‘해수부 마피아(mafia)'로 불리며 해운업계 요직을 독차지해 온 책임을 벗어나기 쉽지 않을 듯싶다. 전직 관료들이 유관기관?단체에 재취업하면서 대형사고와 부실?부패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여객선의 안전관리 기관 및 관련 조직의 수장을 독식하며 제대로 된 관리감독이 이뤄지지 않아 대형 참사를 불러 왔기 때문이다. 독식은 부패를 낳는다. 부패는 사고를 낳는다. 사고 후 드러나는 청해진해운의 실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해운회사였음이 증명되고 있다.

감독이 관용을 베푸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관리를 잘못하는 자보다 관용을 베푸는 자의 책임이 더 크다. 관용은 적당히 봐주기나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눈 감아 주는 행위다. 많은 승객들이 타는 여객선의 안전관리는 빈틈없는 확인과 엄격한 지도 감독이 필수다. 거기에는 티끌만한 부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수많은 부실과 부주의, 태만과 부책임이 누적된 결과다. 선령(船齡)이 한참 지난 세월호 점검 때 무엇을 보고 ‘양호’하다고 했는지 의문투성이다. 이기적인 관료조직이 비극을 키웠다. 구김살 없이 밝고 건강한 꽃다운 아이들을 허망하게 보낸 기성세대는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미래가 있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