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환의 여의도칼럼] 윤이상과 통영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1972년 뮌헨올림픽 전야제 당시 자신이 직접 만든 오페라 '심청'을 연주해 동양과 서양의 접목을 시도했던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1917∼1995)이 타계 10년 만에 고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동영 통일부 장관, 박재규 경남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종수 KBS 이사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주미대사 내정자), 고희범 한겨레신문 사장,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 김민 서울대 음대 학장, 김용배 예술의전당 이사장 등 각계의 사회지도층 인사들로 구성된 윤이상평화재단 추진위원들이 최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 여의도 통신 대표기자 정지환
한 달 후로 다가온 재단 발기인대회를 앞두고 지난 1월 11일 열린 이 추진위원 모임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글까지 인용하며 정부도 윤이상을 기념하는 일에 적극 나설 것을 약속했다. "주의와 사상은 봄에 돋아나고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와 같으나 민족은 푸른 하늘과 같이 영원한 것이다." 정 장관이 인용했다는 대목이다.

그러나 윤이상은 죽기 전에 고향 산천 한번 찾으려 했건만 조선일보를 비롯한 '피도 눈물도 없는' 일부 보수 언론에 의해 친북 인사로 매도당하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머나먼 이국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변화는 격세지감이거니와, 윤이상은 정녕 이제야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셈인가.

대다수 언론 보도는 여기서 머물렀다. 그러나 이미 지난 2000년부터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에선 그의 유업을 기리는 통영현대음악제가 열려 왔다. 실제로 이 음악제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윤이상의 고향 통영'을 '모차르트의 고향 찰쯔부르크'처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윤이상에게 통영은 어떤 존재였을까. 1995년 11월 4일 오전 0시 45분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가 침대 머리맡에 항상 통영 사진을 붙여 놓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94년 조국 방문이 좌절된 직후 고향의 시민들에게 이런 육성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인,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서 평생 작품을 써 왔습니다. 내가 구라파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 번도 통영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결, 가끔 파도가 칠 때의 그 소리마저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 가는, 초목을 스쳐 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독재 정권과 보수 언론의 세뇌 공작에 의해 대다수 통영 시민마저 윤이상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반체제 인사'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무렵 '통영 사람' 윤이상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일단의 사람들과 지역언론이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꿈에 만난 윤이상'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던 향토시인 최정규 씨 등 일단의 사람들은 1994년 9월 17일 고전음악을 사랑하는 한 동호회가 주관하는 형식으로 '윤이상 음악의 밤'을 열었다. CD를 이용해 감상하는 수준에 머물긴 했지만 그것은 '보수의 도시' 통영에서 최초로 열린 윤이상 기념 행사였다. 김일태 PD의 주도로 1998년 11월 마산MBC FM라디오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윤이상 특집방송은 대중적 관심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마침내 1999년 5월 26일 통영문화재단 등 보수 성향 단체가 주도하는 '윤이상 가곡의 밤'이 성대하게 열렸고, 이듬해인 2000년부터 통영현대음악제가 시작될 수 있었다.

윤이상과 통영의 인연은 '풀뿌리'가 '세계화'로 가는 '길목'이 분명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지나쳤거나 무시했던 '옥천, 서천, 울진, 평택, 수원, 상주, 부천, 영주의 윤이상'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