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한 나라 만들기...젊은 세대의 몫"

[이사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신고 접수한 김동렬 옹

이달 1일부터 시청 총무과에서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신고’접수를 시작했다.

접수 첫날 가장 먼저 피해신고 접수를 마친 김동렬 옹(83),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기억들을 하나씩 풀어냈다.

“일본으로 끌려가면 다들 ‘죽은 목숨’이라 생각할 정도였지”

1922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한 김동렬 옹은 우리 나이로 22세 되던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했다.

양복점과 세탁소를 운영하며 ‘옷감’을 매만졌던 김 옹은 하루아침에 비행기 부품을 제작하는 곳으로 보내져 ‘기계’와 씨름해야 했다.

   
▲ 강제징용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김동렬 옹

김 옹은“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일본으로 끌려간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겼다”며 당시 함께 징용된 이들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공포를 전했다.

나고야에 도착한 김 옹은 이곳에서 한 달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을 때부터 고통의 시간이 시작됐다고 술회했다.

그는“배급된 식사가 부실했고 콩, 미역줄기 등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했다”며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인근 밭에서 몰래 감자를 캐먹다 들켜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김 옹은 자신과 함께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보내진 3천2백여명 가운데 천 3백여명 정도가 고국으로 생환했다는 말로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대변했다.

훈련기간을 마치고 나고야 인근 이다미란 곳으로 보내진 1943년 11월, 김 옹은 ‘미쯔비시社 비행기 부품제작공장’으로 배속됐다.

“B-29가 하늘을 덮자, 주위는 불바다로 변했어”

김 옹을 포함해 300여명의 조선인들은 이다미로 보내져 ‘산업전사’라는 명목으로 비행기 부품 생산 현장에 동원됐다.

이 곳은 오사카, 나고야 등 도심과는 떨어진 교외 지역으로, 다행히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주말에 도심에 놀러갔다 폭격으로 죽은 이들도 있었다”며 “미국의 B-29 폭격기가 하늘을 뒤덮고 폭격을 감행하자, 주위는 불바다로 변했고 방공호조차 무용지물이었다”고 지옥도로 변한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한 듯 설명했다.

   
▲ 당시의 사진을 보며 설명하는 김동렬 옹

“'조선인은 들쥐…' 공포 분위기 조성”

1945년 해방을 맞이해서도 김 옹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고야에 집결했을 때, 우리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적개심이 극도에 달했다 ”면서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군인들이 조선인을 패전의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일본의 한 신문이 ‘들쥐(조선인을 지칭)가 일본인의 곡식을 훔쳐먹다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로 이런 분위기에 불을 지폈다”며 살벌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심지어 조선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일본인이 있을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해져만 갔다.

“이 때 조선인 대다수가 비분강개하며 죽을 각오로 싸우자고 목소리를 높일 정도로 비장하기까지 했다”고 김 옹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양식있는 일본인들의 중재로 양측은 충돌을 피했고, 조선인들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5년 10월, 귀국한 김 옹은 부산의 해군 군속으로 들어가 군인들을 위해 세탁과 수선일을 시작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삶은 어땠냐는 질문에 김 옹은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을 털어놨다.

맹호부대 소속으로 월남에 파병됐다 돌아온 김 옹의 장남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차남은 간염으로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징용 당시 일본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두번째 앉은 이가 김동렬 옹

“임금도,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 보상도 받은 적 없다”

50대(정확한 연도는 기억못함)에 상경해 청량리에서 바둑기원을 운영하던 김 옹은, 15년 전 수원으로 이주했다.

현재 김 옹의 주된 수입원은 월세를 놓아 생기는 30만원 정도이며, 가끔 운동삼아 폐지를 모으면서 부수입을 얻기도 한다.

강제동원에 대한 보상과 관련해 김 옹은 “귀국을 앞두고 일본측이 ‘그동안의 임금은 일시불로 송금해주겠다’고 했으나 아직까지 한푼도 받지 못했다”며, “1975∼77년 기간중 한일협정에 의거한 보상도 받은 적 없었다”고 밝혔다.

아마 4단의 바둑실력을 지닌 김 옹은 “바둑과 벗들을 만나는 게 사는 낙”이라며 지금도 자전거로 산책하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김 옹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며 앞으로의 소망을 묻자 “과거 일제시대와 같은 아픔과 고통의 세월이 없도록, 젊은 세대들이 이 나라를 힘있고 굳건하게 이끌어 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올해로 광복 60주기를 맞지만 작년에서야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을 정도로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우리의 여정은 아직 멀기만 하다.

하지만 그 여정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는 김동렬 옹과 같이 일제강점기동안 강제 노동과 죽음의 공포로 하루하루를 보낸 분들의 사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