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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통신 정지환 대표기자 | ||
"찾았다!"
2003년 4월 19일 필자와 현장까지 동행한 오한흥 옥천신문 사장(현 여의도통신 대표이사)의 단말마 같은 외침이 싸리 꽃 만발한 작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먼지가 잔뜩 낀 포장 밑 부분을 살짝 젖히자 묘비로 보이는 바윗덩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포장을 벗겨내는 일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장방형 물체의 사방이 굵은 밧줄로 꽁꽁 묶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묶여진 밧줄의 매듭을 풀고 비닐 포장을 벗겨내자 묘비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포장을 벗겨내는 순간 족제비 한 마리가 뛰쳐나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도망간 것이다. 발가벗겨진 묘비 옆에는 족제비 배설물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더욱이 묘비는 몸체, 머릿돌, 안내 표석이 각각 분해된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죽어서도 편치 못한' 친일파의 말로를 증언하는 듯했다.
실제로 김창룡의 후손들은 아무도 모르게 묘비를 이곳으로 옮겨놓은 터였다. 오 사장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명을 한번 읽어보세요. 여기 마지막 부분에 '단기 4289년 2월 3일 입'이라고 써 있군요. 이게 '설 립(立)' 자 아닙니까? 말 그대로 묘비는 서 있어야 하는 건데, 쓰러져 있는 묘비라니…. 정 기자, 기사 제목 나왔네요. '누워 있는 묘비가 역사의 무서움을 증언하다'로 하면 어떨까요? '김창룡 묘비는 왜 숨어서 누워 있나?'도 괜찮을 것 같고요."
그로부터 2년이 흐른 뒤 필자는 한 제보자의 주선으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후손과 만날 수 있었다.
봉강 정해룡 선생(1914∼1969).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항일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아낌없이 바쳤던 인물이다. 그는 1938년 향리에 양정원(養正院)을 설립하여 미래의 동량을 키우기도 했으며, 1929년과 1943년 대흉년이 들자 백미 수 백석을 내놓아 구휼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아예 전답 일체를 소작농과 빈민에게 무상으로 양도했다. 당시 회천면 일대에서 봉강 선생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 자자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파 성향이 강했던 봉강 선생의 운명은 몽양 여운형과 인연을 맺으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봉강 선생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며, 그 인연으로 몽양이 이끌던 근로인민당의 중앙당 재정부장으로도 활약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0여년 동안 혁신정당에 몸담았다.
흑백 논리만을 강요했던 냉전의 그늘 밑에서 봉강 선생은 죽어서도 편안할 수 없었거니와, 1971년 그를 존경하던 사람들이 건립했던 '우국지사 봉강 정해룡 선생 추모비'가 관동군 장교 출신 박정희 정권의 억압으로 땅속에 묻히는 수난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와 함께 김창룡과 정해룡의 사후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창룡의 친일 전력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고,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력의 붕괴와 함께 김창룡의 묘비는 후손의 손에 의해 쓰러졌고, 바로 그 시간 땅속에 묻혀 있던 정해룡 추모비는 발굴되어 빛을 보았다.
이번에 여운형을 비롯한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추서는 그런 점에서 운명적이기까지 하다.
"친일청산이 안되고 국회에서 과거사법 논의도 지지부진해 너무 답답했다. 정치권과 정부가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국민이라도 나서야 한다."
충남 예산 충의사에 걸려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철거해 삼일절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켜준 양수철 민족문제연구소 전 충남지부장(뉴스서천 사장, 여의도통신 이사)의 단말마 같은 발언에 주목한다.
정지환(여의도통신 대표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