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문화(文話) 시대] 열 번째 밤을 밝히는 수원화성, ‘소비되는 밤’에서 ‘기억되는 도시’로

최민 문화에디터
최민 시사만화가
최민 시사만화가

낮 동안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뙤약볕이 성벽 너머로 기울고 나면, 수원화성 성곽길엔 기분 좋은 밤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햇살을 피해 고즈넉한 문화재의 밤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만큼 근사한 휴식도 없다. 2017년 처음 밤길을 열었던 ‘수원 국가유산 야행’이 올해로 열 번째 잔치를 맞는다. 오는 8월 사흘간 펼쳐질 이번 주제는 ‘수원연향’. 정조가 꿈꿨던 왕도의 잔치를 2026년 여름 밤하늘 아래 다시 펼쳐내겠다는 포부다.

돌이켜보면 참 찬란했던 여정이다. 수원 야행이 이뤄낸 결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가장 큰 공헌이라면 캄캄하게 닫혀 있던 밤의 문화재를 시민의 삶 속으로 끌어당겨 역사유산의 현대적 재해석을 성공시켰다는 점이다. 정적인 관람에 머물던 성벽과 행궁에 미디어아트와 다채로운 체험을 입히자, 잊혀가던 원도심 골목길엔 순식간에 젊은 인파가 몰려들며 활력이 넘쳤다. 축제를 매개로 원도심 상권에 돈과 사람이 도는 ‘야간 경제’의 틀을 다졌고, 수원을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야간 문화 관광의 선두 주자로 올려놓은 것 역시 지난 시간이 남긴 값진 성과다.

특히 올해 행사에서 눈길을 끄는 반가운 대목은 공개 모집으로 선발된 지역 예술인들이 행사장 주요 거점 곳곳에서 생동감 넘치는 거리예술을 펼친다는 점이다. 외부 대형 기획사에만 의존하던 기존 축제 틀에서 벗어났다. 성곽길 모퉁이에서 젊은 음악가가 가야금을 뜯고, 행궁동 골목 공방들이 문을 열어 방문객을 맞이하는 풍경은 자못 정겹다. 지역의 젊은 창작자들에게 성곽길이라는 멋진 무대를 내어주고 축제의 주역으로 세운 결정은 참 반가운 변화이자 박수받아 마땅한 시도다.

다만 이 소중한 걸음이 더 큰 열매를 맺으려면, 조명이 꺼지고 축제가 끝난 이튿날 아침을 미리 고민해야 한다. 솔직히 전국의 수많은 야행 축제가 마주한 공통된 고질병이 있다. 바로 먹거리와 플리마켓 같은 ‘야시장’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다. 맛있는 먹거리와 아기자기한 소품은 당장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데 유용하지만, 자칫 축제의 본질이 흔한 밤시장에 머물게 만들 위험을 품고 있다. 잠깐의 상권 활성화 뒤에 소음과 쓰레기, 젠트리피케이션의 씁쓸한 그늘만 남는다면 국가유산 축제로서의 명분도 옅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아쉬운 대목은 성숙의 기로에 섰음에도 “이것 하나만큼은 꼭 봐야 한다”라고 내세울 독보적인 역사 킬러 콘텐츠가 여전히 목마르다는 사실이다. 일본 교토의 기온마쓰리, 프랑스 리옹의 빛축제,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처럼 세계인을 사로잡는 축제는 먹거리가 아닌 도시 고유의 서사에서 나오는 독창적인 대표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건다. 수원 야행 역시 야시장 풍경을 넘어, 정조의 실학사상과 화성에 서린 역사 콘텐츠의 비중을 대폭 높이는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대한민국 대표 야간 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문화유산 야간 페스티벌’로 도약하려면 이제 내실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수원화성의 웅장한 서사 위에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역사 스토리텔링을 결합해, 수원을 찾은 세계인이 탄성을 지를 만한 시그니처 프로그램을 키워내야 한다.

동시에 축제 예산의 일부를 지역 청년 작가와 골목상권을 지원하는 상설 플랫폼에 투입해, 일 년 내내 창작이 순환하는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주민과 지역 예술가가 구경꾼이 아닌 당당한 주체로 서게 될 때, 축제의 뿌리는 비로소 세계를 향해 단단히 내릴 수 있다.

수원화성은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배경이나 야시장의 무대가 아니다. 18세기 사람들의 고민과 첨단 기술이 서려 있는 삶의 터전이자,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다.

낮의 열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성곽길을 거닐며, 역사와 빛,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열 번째 밤의 잔치를 꼭 한번 직접 느껴보시길 권한다. 이번 ‘수원연향’이 화려한 조명 쇼와 먹거리를 넘어, 이곳을 찾는 시민과 세계인 모두에게 “이 도시는 왜 특별한가”라는 묵직한 울림을 주길 바란다. 밤하늘을 수놓은 빛이 꺼진 뒤에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진짜 유산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수원을 넘어 세계인을 사로잡는 글로벌 문화유산 축제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최민 전국시사만화협회 회장